(3)사회 갈등·위기 때마다 희생양…성정체성에 ‘죄’를 묻다

2017.06.04 22:05 입력 2017.06.04 22:11 수정
허민 | 문화연구자

‘소수자의 앎’ - 동성애

2015년 7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성소수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를 주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5년 7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성소수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를 주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동성애 반대하십니까?

대선후보 토론에서 던져진 질문이다. 마치 사상 검증을 하듯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추궁한다. 답은 쉬이 나오지 못하고, 누군가는 이 질문이 자신을 향하지 않은 것에 안도한다. 질문일 수 없는 질문과 애매한 답이 오고갈 때, 동성애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성정체성이 찬반의 대상이 되고, 자기의 존재가 이해관계에 따라 부정되거나 긍정된다면? 아마 단순한 비참을 넘어 생존의 위협을 감지했을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앞당겨진 ‘장미대선’이 누군가에겐 남은 생애가 걸린 ‘운명의 장’이 되고만 것이다. ‘민주주의의 꽃’이 ‘흉기’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동성애자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투표했다.

물론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의 역사는 유구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 부당함에 대한 사회의 인식 수준이 마냥 낮다고 진단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적 취향’과 ‘성정체성’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 정도는 이제 안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부정하거나, 혹은 그러한 태도를 공론장에서 발화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가 논쟁으로 비화할 때는 당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법과 제도 마련을 둘러싼 ‘이해갈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갈등은 역사적으로 상이한 방식과 수준에서 진행되어 왔다.

1965년 5월15일자 외설 출판물을 경계하고 출판윤리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경향신문 기사.

1965년 5월15일자 외설 출판물을 경계하고 출판윤리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경향신문 기사.

■ 불온한 사랑

동성애에 관한 논쟁은 동성애자의 실제 안위(安危)와는 무관한 이유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틀어 대개 그래왔다. 동성애자들은 ‘국가의 부강’이나 ‘민족의 개조’와 같은 대의를 위해 희생되거나, ‘연애관’ ‘위생’ ‘성규범(성도덕)’과 같은 풍속·생활개량의 차원에서 척결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부정되어야 했음은 물론이고, 때로는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배제되기도 했다.

근대 초기는 연애가 민족 개조를 위한 방법으로 부상했다. 조혼이나 정혼 풍속이 만연하던 때에 ‘자유연애’가 계몽의 과제로 제기된 것이다. ‘자유연애’는 내면의 형성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대사회의 성립을 확인하는 지표로 여겨졌다. 더욱이 연애관계에 입각한 ‘자유결혼’은 국가의 문명이나 부강을 기대할 수 있는 제도적인 토대로 간주되기도 했다. 1920~1930년대의 ‘자유연애’가 ‘해방의 기표’이자 ‘대중의 유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사회적으로 장려된 측면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성애는 금지되었다. 연애가 민족 개조를 위한 문화적인 실천이 된 순간부터 정상성의 규범이 작동했다. 연애의 감정적 기반인 사랑은 일탈과 과잉의 위험을 항상 잠재하고 있는 내밀한 열정이었다. 그에 대한 통제와 규율은 당연하며 문명화의 필요가 제기되었다. 동성애는 ‘불온한 사랑’을 대표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동성애는 흔히 “교정되어야 할 비정상적 상태”로 호명되었고, ‘성적 미숙아’의 비이성적 행위로 규정되었다(‘신여성’ 1924년 12월). 이러한 차별은 여성혐오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기도 한다. 동성애는 주로 여성에게 발견된다고 전제한 뒤, 이를 여성의 성적 무지에서 기인한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반면 점차 급증하던 ‘배운 여성’들에 대한 경계가 작동하기도 했다. 그녀들은 보통 여자보다 성질이 횡포하고, 남편에 만족을 못하며 그릇된 성욕이 싹터 동성애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동아일보 1928년 3월15일자). 이처럼 ‘자유연애’ 담론의 자유는 ‘남성-지식인-이성애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고, ‘여성-동성애자’의 사랑은 허용되지 않았다.

■ 검열과 제재의 심화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 이후에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확산되었다. 전시에는 미풍양속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이때의 동성애는 주로 ‘변태성욕’으로 묘사되었고, 때로는 동성애의 양산 자체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여기기도 했다. 동성애를 유포하여 군의 기강을 저하시키는 계략이 있다는 것이다. 군풍기 단속이 동성애 혐오로, 동성애 혐오가 반공주의로 연결되는 놀라운 비약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통제가 국가(와 그에 준하는 민간기관)에 의한 강제적인 검열과 제재로 이어진 것은 박정희 정권에서였다. 특히 출판물에서 다뤄지는 동성애를 금기시했다. 동성애 재현 문제가 단순히 도덕이나 풍속의 영역에서 다뤄지지 않고, 법의 영역으로 이전된 것이다. 1965년에는 뒷골목에 뒹굴어 다니던 ‘외설책’이 서울시경에 의해 압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음담패설에 형법을 적용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때 동성애는 ‘사디즘’ ‘마조히즘’과 함께 변태적 행위로 직접 지시되었다. 같은 해 출판협회에서는 외설출판업자와 출판물 색출을 다짐하며, ‘출판윤리’를 선언했는데, 동성애 역시 단죄의 대상이 되었다(경향신문 1965년 5월15일자).

흔히 박정희 정권의 출판물 단속에 관한 조치는 필화사건을 중심으로 고찰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동성애 문제를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제재가 행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가령 잡지 ‘부부’에는 ‘동성애욕자의 고백수기’라는 표제의 내용이 ‘잡지윤리강령 위반’을 이유로 경고조치가 내려지기도 했고, 한국신문윤리위원회에서는 동성애를 근친상간과 함께 부도덕한 음담패설로 지목하여 단속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는 서구 세계에서 동성애 비범죄화 및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동성애자들의 저항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세계사의 동향에 대해 당시 정부에서는 경제발전과 체제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고, 그에 대한 조치로써 동성애 재현을 단속한 것이다.

동성애자를 성병의 원흉으로 여기고, 동성애를 직장생활의 능률저하, 퇴폐문화 확산, 정신불안, 성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담론도 물론 계속 유포되었다. 동성애는 사회적인 갈등과 위기의 순간마다 질서유지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고, 동성애자들은 동성애 담론에서조차 소외되어 갔다.

[금지를 금지하라](3)사회 갈등·위기 때마다 희생양…성정체성에 ‘죄’를 묻다

■ 혐오할 권리?

그렇다면 최근의 경향은 어떠한가? 말한 대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동성혼의 자유가 이성혼의 자유를 해하지 않으며, 동성애가 다른 사회적 해악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회 풍조는 꽤 강고하다. 다만 과거처럼 동성애 자체를 금지하기보다는 이들의 정체성이 사회의 제 영역에 미칠 효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기초하여, 제재논의를 펼치고 있다.

군대 내 동성애 문제가 대표적이다. 올 초 국방부에서 동성애자 색출 파문이 있었고, A대위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죄목은 ‘군인, 준군인에 대해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군형법 92조의 6, 추행죄였다. 해당 조항의 폐지안이 발의되고, 여러 한계가 지적됨에도 군대 내 동성애에 있어서는 사회적인 편견이 여전하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군대라는 집단의 특수성 때문에 그곳에서의 동성애만은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동성애자로 인해 군의 성범죄율이 높아지고, 군 기강 확립이 어려워질까? 그렇지 않다. 헌병으로 영창에서 근무한 필자의 경험을 돌아보자면, 실제 군대에서 발생하는 거의 대부분의 성범죄는 이성애자들에게서 비롯된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인 군대에서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공개되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료에게 성추행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관련 지표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군대 내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동성 간 성추행을 동성애 문제로 왜곡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종북 게이’ ‘동성애 독재’라는 혐오 표현의 발생 배경과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주로 보수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확산된 표현들이다. 우선 ‘종북 게이’는 ‘빨갱이 혐오’와 ‘소수자 혐오’가 결합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빨갱이’의 (체제) 위협과 성소수자의 (상상된) 해악을 단순히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운동권이 당위로 내세웠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반동의 정서를 종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겐 시민사회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합의된 가치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일관된 태도가 있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를 혐오하지 않으면 자신의 현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가엾은 ‘정신승리’의 과격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동성애 독재’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기본권과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당위를 ‘강제된 것’으로 재인식(?)하고 있다. 즉 동성애자들이 성정체성의 ‘다름’을 주장하듯, 자신들 역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일종의 ‘혐오할 권리’ 혹은 ‘(혐오)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격인데, 이를 민주적인 공동체의 보편적 구성 원리를 부정하는 제스처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반대로 그렇게 자명하게 주어진 가치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사회적 갈등을 직시하며, 자신을 그에 따른 피해자로 여기는 전도된 상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 그리하여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를 평등이 아니라 특혜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그 부당성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신종의 혐오표현은 자신의 현재를 납득할 수 없는 청년들의 피해의식과 패배주의가 빚어낸 슬픈 자학에 다름 아니다.

■ ‘차별금지’를 금지하는 시대와 ‘소수자의 앎’

촛불혁명은 정권교체를 이루었지만,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차별금지법의 입법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강제한 ‘소수자성’을 경유하지 않고는 도무지 자신을 대표하거나 재현할 방법이 없다. 공론장에서 발화되는 그들의 언어는 개별자의 그것이 아니라 ‘소수자 일반’의 목소리로 환원되어 버린다. 오로지 소수자로서만 말할 권리가 확보되는 자들의 비참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자신도 언제든 소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려는 ‘다수의 환상’에 의거한다. ‘차별금지’를 금지하는 시대에 ‘다수의 환상’을 반성케 하는 새로운 사유와 지식의 지평을 ‘소수자의 앎’이라고 해두자. 오래도록 금지되었던, 그 침묵의 소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할 거라고 여전히 기대해 본다.

<경향신문·인문학협동조합 공동기획>

■필자 허민

[금지를 금지하라](3)사회 갈등·위기 때마다 희생양…성정체성에 ‘죄’를 묻다


한국 근대문학·문화론을 연구한다. 주요 평론으로 <당신들은 읽지 마세요: 적이 없는 시대의 문학과 비평> <블랙리스트와 서명의 정치> 등이 있고, 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2014), <흙흙청춘>(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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