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이뤄내는 진실의 힘” …위안부 연구팀 3인이 전하는 영상 발굴 풀스토리

2017.07.15 16:13 입력 2017.07.16 10:45 수정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는 근·현대 문서가 100억장, 영상 필름이 30만장 이상 보관돼 있다. 연구목적이라면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 전 세계에서 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김한상 미국 라이스대 연구원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이 남긴 기록영상들을 돌려보고 있었다. 필름이 돌돌 말려 있는 릴은 사람 얼굴 크기만 했다. 내용은 두서가 없었다. 부대명도 알 수 없는 여러 군인들의 얼굴이 나왔다가 뜬금없이 무기가 등장하기도 하고, 다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필름 릴 하나를 영사기에 걸면 이런 내용이 1시간 넘게 진행됐다. 완성된 기록영화가 아니라 전쟁 당시 이것저것 촬영한 필름이었기 때문이다. 1944년 중국에서 촬영된 한 필름에서 중국군과 미군의 모습을 담은 영상 사이 여성 포로들의 얼굴이 스쳤다. 김 연구원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아우라(aura)가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어둡고 불안해하는 표정들이 확연히 드러났거든요. 특히 앞뒤로 등장하는 중국군의 환한 표정과 대비됐습니다.

서울대 인권센터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팀 연구원들이 7월 11일 서울대 인권센터 건물 대회의실에서 한국인 위안부 영상의 발굴 과정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한상 미국 라이스대 연구원,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 이상훈 선임기자

서울대 인권센터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팀 연구원들이 7월 11일 서울대 인권센터 건물 대회의실에서 한국인 위안부 영상의 발굴 과정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한상 미국 라이스대 연구원,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 이상훈 선임기자

김 연구원은 복제본의 해당 부분 영상을 잘라내 위안부 기록물을 수집·연구하는 한국의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에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냈다. “맞는 거 같아!” 한국시간으로 새벽 시간이었지만 카카오톡에서는 환호가 터졌다. 한국인 위안부 여성의 모습을 담은 ‘18초’가 세상에 최초로 나온 순간이었다.

표정이 없는 전쟁기록 더미에서 찾아낸 어두운 표정들은 중국 윈난(雲南)성 쑹산(松山)지역 위안소에 끌려갔던 한국인 여성들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1944년 9월 7일 미·중 연합군은 윈난 쑹산을 탈환했고, 다음날인 9월 8일 미 육군 164통신대의 영상담당 에드워드 페이 병장이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영상은 국내 연구팀의 추가적 검증 및 조사작업을 거쳐 7월 5일 서울시청에서 공개됐다.

영상공개 일주일 뒤인 7월 12일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연구팀을 만났다. 영상을 발견하는 과정과 위안부 연구자로서의 고민을 상세히 듣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필름을 발견한 김한상 연구원, 자료팀장을 맡았던 강성현 공동연구원(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연구팀장을 담당한 박정애 공동연구원(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초빙연구교수)이 자리에 함께 했다.

■위안부 영상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일주일 동안 연구팀에는 관심이 쏟아졌다. 국내 언론은 물론 AP통신, BBC, CCTV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언론사들과 인터뷰했다. 국내 언론들은 대부분 ‘세계 최초로 확인된 한국인 위안부 영상’이 한·일 위안부 협정의 재협상에, 나아가 한·일 양국관계에 미칠 파장을 궁금해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정 타결 이후 여성가족부로부터 연구비 지원이 중단돼 팀이 어려움을 겪었으며, 2016년부터 서울시의 지원으로 연구를 해 왔다는 사실도 재조명됐다. 정권도 바뀌었으니 영상이 일본을 재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결정적 카드’가 되기를 기대하는 시선도 적잖았다. 한편으로는 같은 관점에서 사진자료가 있는 마당에 영상자료가 추가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폄훼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연구자들의 관심사와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번 발굴의 의미는 달랐다.

연구팀은 2014년 9월 정진성 교수가 서울대 인권센터장으로 부임하면서 결성됐다. 물론 ‘영상’을 찾는 것이 팀 결성의 목적은 아니었다. 팀의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팀’으로, 위안부 연구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결성됐다. 매주 수요집회가 벌어지고 국민적 관심이 높은데 체계적 연구가 안돼 있다는 말인가. 강성현 연구원은 “위안부 운동이 벌어진 지 25년이 지났는데 ‘백서’ 하나 없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연구가 외교관계에 휘둘리고 정부 용역사업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정애 연구원은 “위안부 관련 연구들은 1년 단위의 연구용역들이 많다. 정부의 ‘사업’ 위주로 움직인다. 그러다보니 연구자들이 이합집산하고 연구기간도 짧다. 관심사도 ‘일본의 강제동원 입증’ 등 정부의 당면과제를 우선으로 한다. 그러다보니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연구성과를 체계적으로 쌓아나가는 일이 힘들었는데 이 팀에서는 가능했다”고 말했다. 2015년에는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좀 더 연구환경이 안정적으로 됐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필름자료 열람 장치. 이 장치로 100여통의 필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영상을 발굴했다. / 김한상 제공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필름자료 열람 장치. 이 장치로 100여통의 필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영상을 발굴했다. / 김한상 제공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 격이었던 영상 발굴도 전공분야가 조금씩 다른 연구자 간의 장기적 교류와 지식 축적이 있어 가능했다. 역사학을 전공한 박 연구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4~6차 구술기록에 참여하는 등 위안부 연구이력이 팀 내에서 가장 오래됐다. 이정은 공동연구원(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은 한국과 일본에서의 인권 담론의 생성과정에 대해 연구했고, 전갑생 공동연구원(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은 한국전쟁과 거제 포로수용소 등을 연구한 한국 현대사 연구자이다. 강 연구원은 사회학 전공자로 넓게는 전 지구적 냉전사, 구체적으로는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학살이 연구주제였다. 10년 넘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드나들며 미국 측 사료 활용의 노하우를 쌓아왔다.

강 연구원은 2015년 가을 무렵 위안부 사진자료를 정리하면서 ‘영상’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미 잘 알려진 ‘만삭의 위안부 사진’은 미 육군 164통신대 사진부대 햇필드 이병이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 사진자료들은 촬영자와 장소, 날짜 등을 잘 정리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강 교수는 164통신대의 구성을 연구하다 이 부대에 햇필드와 ‘2인 1조’로 활동하던 에드워드 페이라는 영상 전담 촬영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군은 심리전을 위해 사진 촬영을 전담하는 부대를 두며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 부대에 영상 담당자가 있고, 이 부대원이 찍은 위안부 사진이 남아있으니 위안부 영상도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강 교수는 2016년 말까지 연구결과를 정리해 교분이 있던 김한상 연구원에게 전달했다.

김 연구원은 ‘1944~1948년 주한 미군정 및 미군사령부 공보국의 영상선전’을 주제로 2013년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상’을 찾는 방법은 사진과 또 달랐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는 2차 대전 당시 미 육군이 중국~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촬영했던 필름만 1만600여편이 있었다. 촬영자와 날짜 순대로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지 않았을 뿐더러, 필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만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영상이 나오다가 네덜란드나 프랑스로 갑자기 공간이 이동하기도 했다. 위안부(comfort woman), 성노예(sex slave), 한국인(Korean)으로 검색해도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중국 여성(Chinese girl) 등으로 검색해 영상을 100여편 정도 추려냈다. “기록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영상에 민간인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어요. 영상에 민간인이, 특히 여성이 등장한다면 반드시 특이사항으로 기록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기록관리자 입장에서 민간인이 중국인인지 한국인(조선인)인지 영상만 보고 파악하기는 힘들어요. 중국에서 찍었으니까 중국인이라 생각했을 거예요.”(김한상)

■1만600여편 중 100여편 추려 일일이 확인

18초 영상은 이렇게 추려진 필름 100여편을 하나하나씩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보며 찾아낸 것이다. 김 연구원은 또 다른 영상도 찾아냈다. 일본군 위안소로 쓰인 호텔 영상으로 ‘용릉(Lung ling)’과 ‘게이샤 걸’(geisha girl)을 검색해서 찾아냈다. ‘게이샤 걸’은 미군이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시절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였고, ‘용릉’은 일본의 중국 점령지 중 하나였다. ‘감’도 중요했지만 필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영상 발굴 소식이 기사로 나간 뒤 한 트위터 이용자(@walking_his_dog)가 “요즘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창의성만 강조되는데 나는 이런 인내심, 집요함이 더 중요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트위터의 이 멘션을 봤다. (쏟아진 반응 중에) 가장 힘이 되는 말이었다”고 전했다.

1944년 중국 윈난성 쑹산 위안소에서 탈출한 위안부 사진. 발굴 경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평양에 거주하던 고 박영심씨 (2006년 사망)가 사진 속 만삭의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사진’으로 입증되는 첫 사례가 됐다. / 서울대 인권센터 제공

1944년 중국 윈난성 쑹산 위안소에서 탈출한 위안부 사진. 발굴 경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평양에 거주하던 고 박영심씨 (2006년 사망)가 사진 속 만삭의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사진’으로 입증되는 첫 사례가 됐다. / 서울대 인권센터 제공

발견한 영상이 최초의 한국인 위안부 영상인지 확인하는 작업도 발견과정 못지않게 치밀하고 고됐다. ‘18초 영상’의 경우 같은 상황에서 찍은 기존의 사진이 있어 검증하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영상을 확대해 얼굴과 옷차림을 대조했다. 그래도 ‘최초’라고 말해도 될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박 연구원은 연세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이 영상을 갖고 나가 일본인 학자들에게 보여주며 “혹시 이 자료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조마조마했습니다. 혹시나 유출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쑹산 위안소 영상은 미국 육군의 자료에서 발굴했는데, 해군 자료를 본다면 오키나와나 남태평양 제도로 끌려간 위안부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한편 영상에 젊은 여성들이 등장했지만 위안부인지 확신할 수 없어 검증작업이 진행되는 자료들도 있다. 이런 자료들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은 현재까지 약 250건의 사진 및 문서자료와 1000여건의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다. 지난해 11월 일본군의 위안부 여성 30명 총살을 기록한 중국 윈난 원정군의 1944년 9월 15일자 작전일지를 공개했다. 일본군이 윈난에서 미·중 연합군에 밀려 퇴각하기 전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증거’ 자료였다. 증언과 증거가 일치할수록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18초 영상에 등장하는 쑹산 위안소의 경우 24명 중 14명이 사망하고 10명만이 포로로 잡혔다. 연구팀은 이런 배경을 거론하며 영상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일본 학자들 보여주며 치밀하게 검증

“쑹산 위안소 생활은 엄청 끔찍했습니다. 매일 포탄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고, 전염병이 돌았죠.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면서 옥쇄(玉碎·‘옥처럼 부서지다’라는 뜻으로 전쟁 당시 죽음을 미화하는 표현으로 사용) 전투를 한다며 포로나 위안부를 학살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쑹산의 위안부 5명이 탈출했는데 1명은 죽고 4명은 중국군을 만나 구출됐습니다. 맨발 상태로 탈출한 것이 당시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일본이 쑹산 황고진지에서 탈출하면서 먼저 탈출했던 여성들이 뒤늦게 구출된 일행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꼭 붙어 다닙니다. 혹독한 상황에서 서로 얼마나 의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강성현)

“(위안부) 할머니들이 털어놓기를 일본군은 ‘너는 위안소 나가면 죽는다. 미군이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세뇌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느냐, 나가서 죽느냐’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여기서는 반드시 죽지만, 나가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한 것입니다. 결국 중국군에게 발견돼 구출된 셈이지만 당시로서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말도 안 통하구요.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내가 어찌될지 모른다’, ‘탈출했지만 나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담고 있습니다.”(박정애)

‘사업’을 위한 연구에서는 주목하지 않았던 내용들이다. 당장의 외교문제를 해결해 줄 획기적 변화는 가져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사진’과 ‘문서’로 뼈대와 살결을 복원했다면 ‘영상’은 숨결을 불어넣은 셈이다.

제2차대전 인도~중국 전선에서 연합군 사진촬영을 담당한 미 육군 164 통신대 사진. 동그라미 친 인물이 영상 담당 에드워드 페이다. 이 사진을 발굴한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위안부 영상’도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 제공

제2차대전 인도~중국 전선에서 연합군 사진촬영을 담당한 미 육군 164 통신대 사진. 동그라미 친 인물이 영상 담당 에드워드 페이다. 이 사진을 발굴한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위안부 영상’도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 제공

미군이 왜 위안부 기록을 남겼는지도 중요한 연구주제다. 강 연구원은 “미군에게 위안부는 ‘심리전’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미군이 남긴 기록을 보면 미군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드러난다. 1942년 12월 미군 보고서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가 어렴풋이 언급되지만 미군은 정확한 실체를 몰랐다. 당시에는 위안부를 prostitute(매춘부), 게이샤 걸 등으로 표현했다. 1944년쯤 되면 미군은 위안부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용어도 위안부(comfort women)로 바뀐다. “조선인의 분노를 자아내 반일 폭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는 소재라 파악하고 이를 위해 기록을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흐지부지된다. 종전 후 새롭게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미국의 적에서 공산진영에 맞설 협력자로 변했다. 미국은 ‘위안부’와 같은 소재를 자극하지 않는 쪽이 한·미·일 안보체제 구축에 낫다고 판단했다. 위안부 문제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유 중 하나다.

위안부 연구는 여전히 학문 외적인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피해 당사자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당사자의 인권보다 다른 논리들이 우선시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구팀에 쏟아지는 갈채와 견제도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존재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정부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선언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는 정책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위안부 관련 당해 예산 21억5000만원 중 18억원을 10월까지 집행하지 않았다.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던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도 ‘자격미달’을 이유로 지원대상에서 탈락했다. 서울시가 2016년부터 1억원을 긴급 편성해 지원에 나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강 연구원은 “정부와 공문을 주고받으며 솔직히 무서웠다. 2016년 말 사업을 종료시켜야 하는 시점에서 여론에 떠밀려 예산을 긴급편성하면서 연구자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무리한 결과물들이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담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이 발견한 영상의 한 장면. 35mm 흑백필름으로 촬영됐다. 연합군이 중국 윈난을 탈환한 다음날인 1944년 9월 8일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쑹산 위안소 생존여성들의 불안한 표정이 드러난다. 팔짱을 낀 채 붙어 있는 두 여성 중 키가 작은 여성은 연합군이 점령하기 전 위안소를 탈출했으며, 키가 큰 여성은 탈출하지 못한 채 위안소에 남아있다가 생존한 여성이다. 연합군의 점령으로 둘은 극적으로 상봉했다. /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 제공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이 발견한 영상의 한 장면. 35mm 흑백필름으로 촬영됐다. 연합군이 중국 윈난을 탈환한 다음날인 1944년 9월 8일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쑹산 위안소 생존여성들의 불안한 표정이 드러난다. 팔짱을 낀 채 붙어 있는 두 여성 중 키가 작은 여성은 연합군이 점령하기 전 위안소를 탈출했으며, 키가 큰 여성은 탈출하지 못한 채 위안소에 남아있다가 생존한 여성이다. 연합군의 점령으로 둘은 극적으로 상봉했다. /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 제공

■학문 외적 상황서 자유롭지 못한 연구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중적 반응도 극과 극을 오간다. ‘반일’과 ‘반(反)반일’이다. 관심과 분노는 뜨겁지만 정작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실제 일어난 일을 정리하고 이들에게 공감하는 작업은 어느 새 뒷전으로 밀려난다. 김 연구원은 “이번 영상과 관련된 뉴스도 카드뉴스 등으로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불편한 점이 있다. ‘고통을 당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고, ‘고통을 지켜주지 못한 나’의 수치심이 있으며, 그 끝은 민족과 국가를 강화하는 방식”이라며 “영상의 힘은 삶의 흐름을 재현하면서 오는 ‘공감’에 있다. 언론이 이 방면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유하 세종대 일문학과 교수가 2013년 출간한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도 생산적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강 연구원은 “<제국의 위안부>도 기존 위안부 운동의 일부와 이에 대한 열광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연구자로서 보기에 <제국의 위안부>는 학술적으로 틀린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를 지적하는 것은 기존 위안부 운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국제적으로는 외교관계에, 정부와 연구자 사이에서는 정책논리에, 대중적으로는 진영논리에 휘말리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의 위안부 문제다.

간극을 메우는 것은 결국 ‘진실의 힘’이라고 연구진들은 말했다. 진실을 발굴해 나가면서 메울 수밖에 없다. 인터뷰에 참여하지 않은 전갑생 연구원과 곽귀병·공준환·이민정 연구보조원은 미국에서 후속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추가 자료 발굴 이외에도 기존에 발굴한 영상 역시 후속 연구를 할 계획이다. 사진과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누구인지 추적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족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고, 위안부 운동의 주체로 서는지 파악해 한 명 한 명의 삶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증언과 문서와 사진을 교차시키는 작업은 이 과정의 핵심이다.

한국인 위안부 여성들이 심문받는 사진. 팔짱을 끼고 서로 기댄 채 뒷모습만 나온 두 여성은 영상자료에서도 내내 붙어 있는 모습을 보였다. /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 제공

한국인 위안부 여성들이 심문받는 사진. 팔짱을 끼고 서로 기댄 채 뒷모습만 나온 두 여성은 영상자료에서도 내내 붙어 있는 모습을 보였다. /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 제공

박 연구원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구술기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 근거로 위안부 여성이 ‘거짓말’을 한다고 불신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지속적인 비난이나 지나친 동정의 영향을 받고 오염된 기억을 갖고 있다”며 “위안부 연구의 핵심은 전쟁이라는 폭력상황이 인간을 어떤 상황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에 있던 여러 상황 속에서 피해자를 중심으로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흐릿하게 굴절된 기억을 타당한 자료로 보완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할 일이고, 이것이 피해자를 중심에 둔 연구자의 시선이라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나아가 한 시대의 역사를, 인간을, 여성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우리가 느끼고 다시 그러고 있는 측면은 없는지. 지금 억압을 받는 누군가는 없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진상규명”이라며 “진상규명을 위한 자료 조사와 자료의 분석.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위안부 문제를 한 인간의 삶으로 인식하고,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정치지도자들이 ‘이건 강제연행이 아니다’라고 주장해도 시민들이 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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