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보다 법적 안정성에 손 들어준 헌재…'나주 경찰부대사건' 국가배상 좌절

2021.11.30 15:49 입력 2021.11.30 16:18 수정

헌법재판소. 경향신문 자료사진

헌법재판소. 경향신문 자료사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나주 경찰부대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배상 청구의 길을 뚫기 위해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지만 ‘너무 일찍’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권리 구제의 기회를 원천 차단당했다.

헌재는 위헌 결정이 나온 날로부터 효력이 생기며 사건 당사자에 대해서만 위헌 결정의 효력이 있다고 규정한 헌법재판소법 75조 등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고 30일 밝혔다.

헌법소원은 ‘나주 경찰부대 사건’의 피해자 유족인 A씨 등이 청구했다. ‘나주 경찰부대 사건’은 1950년 7월 전남 완도·해남·진도 등에서 나주 경찰부대원들이 소속을 숨긴 채 후퇴하다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알고 환영한 주민 97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2007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의 공식 사과와 희생자 명예회복 조치 등을 권고했다.

A씨 등은 2008년 3월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피고 대한민국은 ‘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5년이 경과했다’며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가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유족들의 청구를 기각했고 2009년 6월 유족들의 패소가 확정됐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18년 반전이 생겼다. 헌재는 민법에서 정한 소멸시효 5년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등 중대한 인권침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A씨 등은 이를 근거로 자신들의 청구를 기각한 확정 판결에 대해 2019년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또 A씨 등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 등은 2018년 위헌 결정을 받은 사건의 당사자도 아니었고, 위헌 결정 이전에 패소가 확정된 건이기 때문에 재심을 청구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헌법재판소법은 헌재의 위헌 결정은 사건 당사자나 위헌 결정 이후 건에 효력이 생긴다고 규정한다.

이에 유족들은 해당 헌법재판소법 조항이 위헌이라고 헌법소원을 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심을 통한 구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재판청구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가 집단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이 사건의 경우, 법적 안정성의 요청을 물리쳐야 할 만큼 정의의 요청이 절박한 경우”라고 했다.

헌법재판관 9명의 입장은 거의 절반으로 나뉘었지만, 합헌 의견이 1명 더 많았다. 다수의견에 선 재판관들(유남석·이종석·이영진·문형배·이미선)은 형벌을 부과하지 않는 모든 법규에까지 재심을 허용하면 법적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고 했다. “정의의 실현과 법적 안정성이라는 대립하는 두 헌법적 가치의 형량 내지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5·18특별법, 부마민주항쟁특별법, 제주4·3사건특별법 등 재심 사유에 관한 특별 규정을 둔 법률들을 거론하며 “2018년 위헌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피해자·유족에게 특별 재심을 허용해 구제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머지 재판관들(이선애·이석태·이은애·김기영)은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등 사건의 국가배상청구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해당 조항이) 법적 안정성만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구체적 타당성과 정의의 요청,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외면했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이들은 “위헌 결정 전에 자신의 권리구제를 위해 국가배상을 청구한 경우 앞으로도 구제될 수 없게 된 것”이라며 “권리 위에 잠자지 않고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한 자들에게 그렇지 않은 자보다 불이익을 부여하는 것은 평등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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