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형 장기침체 피하려면 적극적 재정·분배 정책 필요”…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수가 말하는 ‘2020 한국 경제’

2019.12.31 21:28 입력 2020.01.03 17:17 수정

지난달 5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주최로 열린 ‘소득분배의 흐름과 혁신적 포용국가의 과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가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하며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함께 증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지난달 5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주최로 열린 ‘소득분배의 흐름과 혁신적 포용국가의 과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가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하며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함께 증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지금의 한국 경제는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와 같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기 대응에 나서지 않으면 일본처럼 저성장 국면이 장기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49)는 지난달 5일과 30일 경향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불황이 다가올 때 적극적으로 경기 대응을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인데,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재정정책은 실패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는 “노동소득분배율이 개선된 측면이 있다”면서도 “자영업자와 일하지 않는 고령가구에 대한 지원책이 미흡한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소득 상위 20~30%가 실제로 내는 세금이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세금공제를 줄여 세수를 확보해 소득 하위계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재분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2002년부터 리쓰메이칸대에서 거시경제학, 경제발전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세계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해왔으며 경제성장의 요인과 성장과 분배, 빈곤 간의 관계 등을 연구해왔다. 2014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 한국어판을 감수했다. 한국 경제가 일본형 장기불황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한국 경제와 일본 경제의 현실을 두루 관찰해온 이 교수의 의견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 한국 경제가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출산율 감소와 인구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점을 보면 일본과 비슷하다.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게 되면 성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총수요가 줄어드는 점도 유사하다. 일본은 버블 붕괴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3배의 자산가치가 증발하면서 기업과 가계 모두 수요가 줄어들었다. 한국도 수요 둔화 등의 영향으로 올해 물가상승률이 0.4%에 그쳤다. 다만 일본은 버블이 한순간에 터졌지만 한국은 서서히 잠재성장률과 총수요가 위축되고 있다.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와 같다. 그나마 한국이 1990년대 일본에 비해 재정 여력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단기적으로 재정 확대를 통해 정부가 총수요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지난해 한국 경제를 평가한다면.

“2018~2019년에 건설투자 지표가 고꾸라졌다. 2014년에 규제를 풀어 부동산 경기를 부양해 2015~2016년에는 건설투자 지표가 좋았다. 한국은 선진국과 달리 설비투자보다 건설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전 부동산 부양정책에 따른 기저효과에 미·중 무역전쟁으로 수출이 줄어들어 설비투자마저 감소하면서 경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2017년에 있었던 ‘반도체 효과’도 사라졌다. 2018년에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비는 선방했지만 경기부진이 이어지면서 소비도 계속 좋을 수 없었다.”

-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놓고 논쟁이 있다.

“적극적으로 경기 대응을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가 나서서 총수요를 늘려야 한다. 나라살림은 가계살림과 다르다. 일각에서는 정부 재정지출 확대가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지 않을지 걱정한다. 그러나 정부의 공공투자 등 재정지출 확대는 기업 투자를 증가시킬 수 있다. 소비도 촉진된다. 경기를 살리는 것은 정부의 기본적인 책무인데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미흡했다고 본다. 특히 2018년 재정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2018년 하반기에는 경기둔화가 뚜렷했는데도 오히려 정부는 세금을 더 거둬들였다. 2018년 추가경정예산안은 당해의 예상 초과세수를 사용하지 못한 ‘초미니’ 추경에 그쳤다. 긴축 효과가 3년가량 지속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과감한 재정 확장이 필요하다. 곳간에 돈을 쌓아놓으면 노동력과 같은 민간의 생산요소들이 썩는다. 투자와 고용, 소비가 더 성장할 여지가 있음에도 방치하는 것과 같다.”

- 경제가 어려운데 왜 정부는 오히려 허리띠를 졸라맸다고 보나.

“2017~2018년에는 계획했던 것보다 세금이 더 많이 들어와 재정수지 흑자 규모가 커졌다. 세수 예측이 틀렸으면 늘어나는 재정 여력만큼 추경을 한 번 더 편성했어야 한다. 문제는 추경을 편성하려면 정부가 경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당시 정부는 경제지표가 나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판단이 틀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인정하기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정승수(정부의 재정지출이 1 늘었을 때 국민소득이 얼마나 증가하는지 보여주는 지표)를 0.3~0.5로 추계했을 때 GDP의 1.5%인 2018년 초과세수를 모두 지출했다면 GDP 성장률이 3%를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통화정책도 2018년 11월 금리를 올렸을 때는 경기하강 국면이어서 거꾸로 간 셈이다.”

- 일본은 저성장 국면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일본에 ‘채소공항’이라는 말이 있었다. 농촌의 채소를 도시에 실어 나르겠다며 공항을 건설한 것이다. 이 공항들은 비행기 대신 파리만 날렸다. 트럭을 사용하여 채소를 운반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일본은 불황초기에 적극적으로 확장적인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실시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경기가 좋아지면 재정확장을 멈추고 나빠지면 재정확장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과정에서 채소공항처럼 불필요한 단기 공공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2010년대 아베 신조 정부는 ‘세 개의 화살’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 1단계를 통해 일관되게 재정 확대와 확장적인 통화정책을 펼쳤다. 아베노믹스 2단계에서는 인구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일억총활약플랜’을 마련, 청년층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고 동일노동·동일임금 법제화와 노동시간 단축 등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도 일본처럼 ‘5000만총활약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재정건전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재정건전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빠른 고령화로 30년 뒤에는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중간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우려한다. 과연 30년 뒤를 걱정해서 지금 경제가 좋지 않음에도 재정을 풀지 않는 것이 맞는 방향인가. 경기가 안 좋으면 먼저 노인가구나 저소득가구가 타격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채무는 제자리걸음인 반면 가계부채는 늘어나고 있다. 가계부채가 느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

-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해선 안된다는 지적도 있다.

“트럼프식 경기부양은 나쁘다. 미국은 실업률도 낮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 성장률도 좋은데 세금도 깎아주고 계속 돈을 푼다. 심지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에 양적완화 규모를 늘리고 금리도 낮추라고 압박한다. 경기가 좋은 시기에 돈을 풀면 안된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정반대로 했다. 한국은 불황 때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를 떠받쳐야 하는데 못했다. 올해 총수요가 줄어들게 되면 내년에 투자나 소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경기가 악화되면 단지 단기적으로 성장률만 하락하는 게 아니다. 오랜 기간 실직자들이 취업을 못하면서 숙련도가 떨어진다. 미래 전망이 불투명해져 기업들은 신기술 투자도 꺼리게 된다. 최근 미국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단기적인 경기침체가 길어지면 이력효과가 쌓여 장기적인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 정부가 올해 경제성장률 2.4%를 전망했다.

“지난해 투자 부진에 따른 기저효과와 미·중 양국이 무역협상 1단계에 합의한 점이 한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2년 연속 총지출 증가율을 9%대로 유지하면서 재정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올해 예산 증가에서 융자나 기금 출연 등이 큰 만큼 재정지출 증가의 실제 효과는 수치에 비해 제한적일 수도 있다.”

-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불평등이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저소득층의 교육 기회도 가로막아 투자와 생산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자산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미국 민주당 유력 후보로 엘리자베스 워런이나 버니 샌더스가 부각되는 점도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OECD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주류 국제기구에서도 ‘포용적 성장’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에서 ‘왼쪽’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미국에서는 ‘왼쪽’에 위치하지 않게 됐다. 급변하는 흐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불평등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의 격차와 노동 내부의 격차를 줄이거나 사회복지를 늘려야 한다. 세금을 통한 재분배도 있다. 이들 재분배 정책 이전에는 완전고용을 지향하는 거시정책도 있다. 이런 다양한 정책이 균형 있게 함께 진행돼야 한다. 돌이켜보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최저임금만 빠르게 뛰었다. 거시경제 관리는 부족했고 사회복지 확대도 더뎠다.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의지가 있고 방향도 맞았지만 정책수단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미흡했다.”

- 근로자가구는 전반적으로 소득이 증가하지 않았나.

“2018년은 노동소득분배율과 임금불평등 모두 개선됐다. 덕분에 민간소비 증가세도 견조했다. 임금주도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실 노동소득분배율이다. 그러나 가계동향조사에서는 주로 하위 20% 저소득층 근로자 외 가구의 소득이 크게 줄었다. 이들은 평균연령이 70세에 가까운 고령자들이라 임금 인상 혜택을 받기가 어렵다.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려 노동시장에서 격차를 줄인 것은 잘한 일이지만 가구소득까지 내다봤으면 소득분배 관리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야 했다. 소득분배에 관한 공식 지표인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가구소득 불평등도 개선됐다.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25%에 달하고 사회복지는 모자란다. 임금주도성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해 소득주도성장이라고 이름도 붙이지 않았나. 그렇다면 저소득층의 가구소득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 불평등 완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했다고 보나.

“가구소득 불평등만 생각하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기초연금이다. 근로장려세제(EITC)나 실업급여 등 사회수혜금은 주로 중간소득층인 소득(10분위 중)4~5분위에게 혜택이 크게 돌아간다. 아동수당도 소득수준과는 관계없이 젊은 부부가 지원 대상이다. 보편적 복지도 중요하지만 저소득층의 가구소득을 높이기 위해서는 줬다 뺏는 연금 문제의 해결 등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강화하고 기초연금을 확대하는 등 맞춤형 지원책이 필요하다.”

- 증세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세금공제부터 줄여야 한다. 한국의 근로소득세는 명목세율은 낮지 않지만 세금공제가 많다보니 실효세율은 너무 낮다. 소득 상위 10%는 평균 실효세율이 12% 정도인데 이는 그나마 상위 1%가 실효세율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소득 상위 10% 경계에 있는 납세자만 놓고 보면 2016년 기준으로 실효세율이 6%에 그친다. 상위 20%는 평균 실효세율이 9%다. 그러나 상위 20% 경계선에 있는 납세자는 실효세율이 3%에 불과하다. 소득세를 적게 내다보니 전체 세수입에서 소득세 비중도 낮다. 정권 초기 지지율이 높았을 때 소득 상위 20~30% 정도까지 소득세의 실효세율을 높였어야 한다. 거둬들인 세금으로 저소득층인 소득 1~2분위에 집중적으로 지원했다면 불평등은 더욱 개선됐을 것이다. 법인세도 상위 0.1% 기업만 올리지 않았나.”

- 정부는 증세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고 있다.

“고소득층이 세금을 조금 더 내겠지만 그런 ‘폭탄’이 터져야 왜곡되고 불평등한 구조가 개선될 것이다. 일본 아베 정부는 소비세를 8%에서 10%로 인상하면서 늘어난 세수 약 5조6000억엔 중 절반 정도를 무상보육이나 저소득층 고등교육 무상화, 사회보장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당장 재정건전성에는 부정적이겠지만 소비를 늘려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서다. 이제 증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고 사회복지를 확대하려면 중기적으로 세수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도 (증세 논의를) 꺼내지 않고 있다. 멀리 보는 시각이 보수나 진보 양쪽 모두 필요하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