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죽어서도 평온 못 찾은 단재 신채호…정부의 ‘독립지사 홀대’ 씁쓸

2017.03.10 20:58 입력 2017.03.10 21:05 수정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신채호 청주 유적’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지난 4일 오전 청주시 낭성면 단재 신채호 옛묘소 앞에서 단재의 옥사와 암장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유족은 2004년 봉분 붕괴 등을 이유로 이장을 시도하다 군청과 갈등을 빚었다. 이후 단재 유해는 가묘로 옮겨져 있다가 2008년 정비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지난 4일 오전 청주시 낭성면 단재 신채호 옛묘소 앞에서 단재의 옥사와 암장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유족은 2004년 봉분 붕괴 등을 이유로 이장을 시도하다 군청과 갈등을 빚었다. 이후 단재 유해는 가묘로 옮겨져 있다가 2008년 정비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단재 신채호(1880~1936)의 암장에 얽힌 사연을 말하던 중이었다. 지난 4일 충북 청주시 고드미 마을 상당산 기슭 단재의 옛집터에 자리 잡은 단재 묘소에서였다. 그는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고국에 돌아와서도 평온을 찾지 못한 망명 혁명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1936년 뤼순(旅順) 감옥에서 옥사한 뒤 단재 유해는 고령 신씨 집성촌인 고드미 마을로 옮겨졌다. 단재가 일곱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여덟살 때 이사와 자라던 곳이다. 단재는 한일강제병합을 4개월 앞두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일제 조선민사령(1912)에 따른 호적에 오를 턱이 없었다. 항일 투쟁의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 없는 단재가 반대한 일이기도 하다. 관청에서 매장 허가를 받는 건 불가능했다. 종친인 면장이 ‘공개리’에 암장했다. 면장은 이 일로 경찰서에 불려 다니다 파면당했다.

단재는 해방되고도 수난을 겪었다. 이 독립운동가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무국적 상태로 64년을 지냈다. 무국적자 신분은 2009년까지 지속됐다. 후손도 힘들게 살았다. 단재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자혜는 둘째를 임신하고 홀로 귀국했다. 대학 교육을 받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총독부는 산파로 일하는 것마저 방해해 먹고살 게 없었다. 둘째 아들은 1942년 영양실조로 죽었다. 이듬해 박자혜도 병사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단재 유족을 홀대했다.

김 전 관장은 암장에다 무국적 상태로 지낸 독립운동가와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한 유족을 떠올리다 북받쳐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묘소 앞에서 그는 “독립운동가 특히 망명 운동가들 대부분이 겪는 문제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에 방치된 채 아직도 못 들어왔다”고 했다.

경향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4일 신채호기념관에 걸려 있는 단재 영정 앞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경향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4일 신채호기념관에 걸려 있는 단재 영정 앞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신채호 유적지는 올 3월 재개한 ‘경향 70인과의 동행’ 첫 목적지다. 지난해 12월 섭외 때 김 전 관장은 바로 이곳을 떠올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의 역사적 격변기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여겼다. 권력은 이승만·박정희를 끄집어낸 국정 역사교과서 배포를 강행하며 단재 같은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지우려 하던 차였다. 3·1절 주간 단재 유적지를 찾는 일은 마땅해 보였다.

‘경향 70인과의 동행’단 버스는 4일 오전 8시 시청역에서 출발했다. 마이크를 잡은 김 전 관장이 처음 꺼낸 말은 “여러 벗들과 함께 제일 좋아하는 분의 묘소와 기념관을 가게 돼 기쁘다”였다. <신채호 평전>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 인물 30명의 평전을 써온 그는 가장 닮고 싶은 이로 단재를 꼽는다.

김 전 관장은 서울·청주를 오가는 길 중간중간 버스 강연을 진행했다. 민족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간 사상적 전환, 성균관 학자에서 혁명가로 옥사한 단재의 실천적 삶을 아울렀다. 청주행 버스 강연에서 김 전 관장이 강조한 건 ‘혁명’이었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이죠. 그런 그가 북경까지 찾아와서 신채호에게 의열단 선언을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김 전 관장은 의열단 이념과 방략을 천명한 6400여자의 조선혁명선언(1923)을 당대 여러 독립운동 선언문 중 최고로 꼽는다.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선언에서 단재는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라는 무장혁명 투쟁을 강조한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의 사상적 변모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문서다. 김 전 관장은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 같은 구절을 든다.

민중의 힘과 투쟁을 강조한 조선혁명선언은 ‘3·1혁명’의 영향 아래 쓰였다고 김 전 관장은 말했다. 3·1절 사흘 뒤 떠난 동행길에서 단재 혁명론과 3·1혁명의 연결 고리를 설명했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3·1절 광화문 촛불집회 때 무대에 나가 한마디 했어요. 3·1운동이 아닙니다. 3·1혁명입니다. 왕조봉건체제를 거부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했어요. 여성해방을 외친 날입니다. 종교·계층·신분을 떠나 참여했어요. 1800만명 중 220만명이 참여했습니다. 당시까지 세계사에서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나온 혁명이 없습니다. 7500여명이 죽고, 1만6000여명이 다쳤어요. 구속자만 4만8000명입니다. 일제가 폭동, 난동, 반란, 운동이라고 비하한 겁니다. 제헌헌법 초안에도 기미 3·1혁명이라고 들어갔어요. 이승만과 한민당이 혁명이라는 용어가 자신들이 타도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빼버린 겁니다. 결국 정명(正名)이 중요합니다.” 한때 영웅전을 썼던 단재는 ‘3·1혁명’을 보며 소수의 영웅 지배 시대가 지나고 민중·민초의 시대, 혁명의 시대가 오리라 봤다.

동행단은 오전 10시30분 신채호 유적지가 있는 고드미 마을에 도착했다. 유적지 입구엔 “조선 광해군 때 신요라는 분이 곧은 말로 상소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리어 이곳으로 들어와 숨어 살았습니다. 인조가 반정하여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마을을 곧으미, 고디미, 고드미 또는 귀래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이 있다.

신채호기념관 영상실에서 일생을 축약한 5분짜리 영상을 시청하고 기념관을 둘러봤다. 기념관은 단재의 친필 서한과 한시, 뤼순 감옥 수형표와 수형자 모자 같은 유품과 당대 발행한 책을 전시한다. 단재의 주요 사상을 정리한 패널도 내걸었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의 제일대 사건’ 패널 앞에서 김 전 관장이 다시 즉석 강연을 했다. “묘청이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세력에게 일망타진되고, 이 세력이 혁신개혁 세력을 대신해 조선에서 집권합니다. 묘청의 개혁과 실패를 제일대 사건으로 꼽은 건 단재의 독특한 사관을 보여줍니다. 단재사학의 관점에서 해방 이후 제일대 사건으로 저는 반민특위 해산을 뽑습니다. 이승만이 경찰을 동원해서 반민특위를 하루아침에 없앴습니다. 그가 구제하려 한 사람이 노덕술이죠.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했다면 친일매국 세력을 청산하고 민족주의·평화주의 세력이 들어섰을 겁니다.” 김 전 관장 설명 도중 기념관 내 전원이 나갔다. 누군가의 ‘촛불! 촛불!’ 외침에 일행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당은 기념관 왼쪽 5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정면 3칸 가운데 단재 영정을 놓았다. 일행은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문화해설사의 권유로 일행 한 명이 사당 앞에서 단재의 시 ‘한나라 생각’을 읊었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1910년 망명길에 오른 단재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만주로 들어갈 때 멀어져가는 조국 땅을 돌아보며 든 심정을 적은 시다. 만 18세 때다. 단재는 여러 편의 시와 소설을 쓴 뛰어난 문인이기도 했다.

신채호 유적지에서 단재의 어린 시절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수령 130년의 모과나무다. 묘소 뒤편에 서 있는 10m 높이의 모과나무는 1888년 단재 할아버지가 책거리 기념으로 심은 나무다. 단재는 9세 때 <자치통감>을 뗐다고 한다. 가을 모과가 열리면 방문객에게도 나눠준다.

신채호 유적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단재 같은 첫손 꼽히는 독립운동가도 1999년에야 기념관 조성에 들어갔다. 부실·졸속 시공이 문제가 됐다. 당시 청원군 예산은 6억9000만원. 최고 권력자를 기억·기념하는 데는 아낌이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주춤해졌지만, 경북도와 구미시가 지난해 박정희 기념 사업에 책정한 예산은 1400억원이다. 충북 여러 지자체들도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 후부터 대선 출마 포기까지 공원·생가 등에 수천억원의 예산을 잡았다.

기념관은 그 기념 대상의 삶을 반추하며 어떤 미래를 만들지 의지를 다지는 공간이다. 어떤 역사를 후대에 전승할지와 직결된다. 해방 이후 한국의 기념과 기억의 싸움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더 기울어졌다. 신채호기념사업회 지원도 다 끊겼다고 김 전 관장이 전했다.

1983년 준공돼 대통령 공식 별장으로 쓰이다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된 청남대 본관 앞 전경.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1983년 준공돼 대통령 공식 별장으로 쓰이다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된 청남대 본관 앞 전경.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일행이 서울로 가며 들른 청남대 ‘대통령기념관’ 앞엔 이승만 금빛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김 전 관장은 청남대에서 “대통령을 다 모셔놓은 곳과 맞비교하긴 조금 그렇지만, 두 기념관의 대조는 현대사의 굴곡진 징표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1년 있으면 임시정부 100년입니다. 지금까지 임정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지금 서대문구에 건립한다고 하는데 정부가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요.” 3월 현재 정부는 서울시와 함께 임정기념관 건립에 참여 중이지만 소극적이다. 정부는 국립 시설로 짓는 데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 중요한 건 ‘기록’이다. 김 전 관장은 “조선혁명선언을 교과서에 꼭 실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행 버스에서 김 전 관장은 단재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국란기 선각자이자 시대정신 구현자입니다. 둘째 지식인의 사표입니다. 최근 어용 학자·언론인·변호사 같은 지식인들의 탈선을 보게 되는데, 단재는 요즘의 이런 지식인의 나약성과 타락, 변절, 권력지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단재는 또 공화주의 발상자였다. 구국 언론인이고, 민족주의 사학자였다. 민족교육자이자, 격렬한 논객이었다. 이론과 행동을 겸비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였다. 여러 단재를 하나로 꿰는 건 항일 독립을 위한 결기와 지조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병보석 허가를 받았을 때 가족이 어렵게 구한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19차 촛불집회 날이었다. 김 전 관장은 출발길에 인사를 건네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오후 5시까지는 올라올 수 있나요? 가봐야 할 광장이 있는데…”라며 웃었다. 김 전 관장은 이전 18차례 촛불집회 중 감기와 강연으로 못 간 두 차례를 빼곤 모두 참석했다. 4일 저녁 촛불집회는 빡빡한 일정과 열정적인 강연으로 지쳐 참석이 힘들어 보였다.

버스는 오후 6시30분 서울 양재역에 도착했다. 촛불집회와 친박집회에 따른 도로통제로 출발지인 시청역으로 가진 못했다. 동행길에 오른 일행 몇몇이 3호선 전철을 타고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37) 죽어서도 평온 못 찾은 단재 신채호…정부의 ‘독립지사 홀대’ 씁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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