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간부급 독신녀들 “결혼했다면 이 정도 위치까지 못 왔다”

2013.05.10 06:00 입력 2013.05.10 13:44 수정
특별취재팀

가사·일 병행 부담 결혼 미뤄

팀장 직급 중 기혼여성 희소

집안일 이유 태만 후배 답답

“우리 회사 관리자급까지 올라간 여직원은 전부 독신이다.” 여성 사회에서는 흔히 듣는 말이다. 20대 여성 사이에서 ‘여성이 일로 성공하려면 결혼이나 아이는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는 바이블처럼 돼 있다. 과연 일과 결혼은 상충되는 것인가.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결혼을 포기해야 하나. 일은 결혼을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가치인가.

경향신문은 독신 여성 직장인 4명으로부터 남성 주류 조직생활의 현실과 애로점, 여성과 일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개별적으로 이뤄졌다. 그들에게 ‘비혼’은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국 사회 회사조직에서 구성원들은 야근과 주말 잔업을 당연히 수행하고, 업무 후 회식과 술자리까지 감당해야 한다.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운 남성과 결혼하지 않은 여성만 살아남게 되는 구조다. 4명은 한결같이 “독신을 추구했던 건 아니지만 일을 하다 보니 때를 놓쳤다”며 “일과 가정은 병립이 불가능한 구조”라고 말했다.

정보기술(IT) 업체인 로그인디의 조현경 대표가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독신여성의 일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정보기술(IT) 업체인 로그인디의 조현경 대표가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독신여성의 일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 독신론자인가. 결혼했다면 어떨까

경정은(36·온라인 마케팅대행사 마케팅팀장)= 결혼을 했으면 살아남지 못했다. 결혼한 여직원들은 하는 일의 비중이 높지 않아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일을 맡는다. 나는 여태까지 이뤄온 경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우리 회사 최초의 여자 과장, 여자 팀장이다. 지금 팀장급들을 보면 결혼 안 한 여자이거나, 아이가 없는 남자이거나, 부인이 전업주부인 남자 셋 중 하나다. 우리 회사 일의 특성상 갑자기 일거리가 생기면 주말을 반납하고 일해야 할 때도 많다. 빼지 않고 다 했다. 앞으로 결혼은 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

김지윤(40·백화점 영업차장)= 쉬는 날에도 나와 일하는 경우가 잦았고 특별한 일 없으면 늦게까지 나와서 일했다. 열심히 일한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일을 열심히 해서인지 같은 직급 중에 기혼여성은 찾아보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아이가 있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올라오기야 했겠지만 지금보다는 늦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현경(40·IT업체 대표)= 남자들은 결혼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지만 여자는 아니다. 지금도 3~4시간 자고 잠자는 시간 빼면 다 일한다. 이렇게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 낳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결혼은 나중에 하자고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결혼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남자 직원들이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술 마시러 갈까”라는 말을 애엄마 차장들한테는 못하는데 결혼 안 한 나한테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남자들끼리 가는 운동이나 식사자리에 같이 다녔고, 그러다 보니 네트워크가 생겼다. 그 네트워크를 믿고 창업까지 했다. 만약 아이가 있었다면 창업은 못했을 것 같다.

김은숙(38·의류원단업체 기획실 차장)= 결혼 생각이 지금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는 출장이 굉장히 많다. 나는 회사에서 가라는 대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로 출장이 주어지는 편이다. 이사님은 “네가 결혼을 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안 하는 게 회사에 도움이 더 된다”고 하더라.

■ 독신여성에 대한 편견은

김지윤= 여성관리자다 보니, 직원들이나 거래처에 부드럽게 대하면 빨리 해결이 안되는 문제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큰 실수를 하면 세게 지적하는 편이다. 쓴소리 듣는 걸 이해하는 직원도 있는데 삐치는 직원도 있긴 있더라. 자기들끼리 “노처녀 히스테리 부린다”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조현경= 관리직으로 올라가면 상대하는 거래처 사람이든 회사 사람이든 다 남자다. 게다가 이 업계에 술자리가 정말 많다. 사람들이 내가 여자라서 불편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술을 더 열심히 마셨다. 끝까지 남아서 사람들을 다 보내고 나서야 집에 갔다. 결국에는 업계에 내가 술이 세다는 소문이 나더라.

■ 일하는 엄마와 독신 상사 사이에 갈등은 없나

김은숙= 왜 없겠나. 적어도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에만 신경써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같이 일하려면 방법은 다 찾아진다. 솔직히 이런 일들이 완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잘 협조해서 방안을 만들어가면 충분히 같이 일할 수 있는 것 같다.

경정은= 같은 여자로서 답답하다. 결혼하고 아이 낳았다는 이유로 여직원이 할 일 안 하고 일찍 가버리는 일이 반복되면 윗분들은 “결혼한 여자들은 다 저래”라고 생각한다. 객관적 성과가 좋은 여직원들도 결혼하는 순간 그 편견에 갇혀버리니까, 그런 행동이 전체 여직원에 대한 편견을 만든다. 여성 당사자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김지윤= 정해진 일을 끝내놓고 칼퇴근하는 건 괜찮다. 그렇지만 아이 때문에 일을 빠진다는 얘기를 다 받아들여줄 수는 없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야박하다는 소리를 듣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기혼 여직원이 아이 유치원 재롱잔치가 있다고 하면 그날에 휴무를 맞춰주는 등 배려는 해준다.

■ 여성에게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조현경= 후배들에게 “너는 로드맵이 뭐냐”고 자주 묻는다. 직장은 돈을 벌기 위한 곳만은 아니다. 직장을 다니며 체험하는 일반적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이 삶에서 중요하다.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로드맵을 잘 잡아야 한다. 결혼과 아이가 사회인으로서의 로드맵에 크게 영향을 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에 대한 로드맵이 확고해서 결혼에 내줄 틈이 없었던 것뿐이다. 나처럼 결혼을 아예 하지 말고 일만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여자라고 해서 결혼이 일에 큰 영향을 주면 안된다는 거다.

김지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길게 가려면 어차피 일과 가정 둘 다 신경쓰며 살아야 한다. 대기업 부장급 여성 중에 딸이 20세인 분이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시댁에서 봐주고, 가족들이 많이 도와줘서 회사일까지 잘해냈다. 그런 분이 진짜 일을 잘해내는 사람인 것 같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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