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뱅이 이야기

2016.06.14 20:48 입력 2016.06.14 20:49 수정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여기 지독한 게으름뱅이가 있다. 하도 안 씻어서 머리가 헐고 몸에 부스럼이 나는데도 게을러서 그냥 그렇게 지낸다. 방에서는 앉아 있는 게 귀찮고 길에서는 걸어 다니는 게 귀찮다. 그저 허수아비처럼 두 다리를 쭉 뻗고 멍청히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게으름도 질병 수준인데, 주변에서 아무리 말하고 치료해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어느 날 그를 고쳐보겠다는 ‘부지런쟁이’가 나타났다. 오랜 공부 끝에 깨달은 바가 있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백성들을 잘살게 하려고 쉴 틈 없이 일했던 성군들처럼, 만물을 낳고 기르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 저 하늘처럼 부지런하게 살아야 마땅하다며 게으름뱅이를 가르치려 들었다. 게으름뱅이는 게을러빠진 눈을 멀겋게 뜨고 이야기를 듣다가 피식 웃고는, 배워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며 한마디 한다. 그래 봐야 하루 종일 허덕거리며 일만 하다가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잠꼬대나 하다 보면 또 아침이 되곤 하니, 그런 부지런함이 무슨 소용 있느냐며 부지런쟁이를 내쫓아버렸다.

[송혁기의 책상물림]게으름뱅이 이야기

부지런쟁이가 한참 생각하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맛난 술과 멋진 음악을 준비해서 다시 찾아갔다. 오늘처럼 좋은 날을 함께 즐기고 싶어 왔다고 말하자, 게으름뱅이는 반갑게 웃으며 부리나케 일어나더니 어느새 대문 밖까지 뛰어 나왔다. 수십년의 게으름이 일시에 모조리 없어져 버린 것이다. 둘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 뒤로 게으름뱅이는 평생 부지런하게 살았다고 한다.

성간(1427~1456)이 자신을 빗대어 지은 <용부전(용夫傳)>인데, 참 묘한 글이다. 부지런함을 권고하는 것도 아니고 게으름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게으름뱅이가 평생 부지런하게 살게 되었다는 게 결말이지만, 그 부지런함이 애초에 부지런쟁이가 말한 부지런함은 아니다. 이미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경계는 의미가 없다. 나도 모르게 그리로 가게 되는 즐거움.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거기에서 행복은 결정된다. 쳇바퀴 도는 삶처럼 목적을 상실했다면 우리의 부지런함은 그저 그만큼의 고역일 뿐이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즐거움이 있다면 부지런함은 그대로 기쁨일 것이다.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지런한가? 그래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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