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를 공유하는 윤리

2016.05.22 21:00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은 생각보다는 덜 무서웠다. 다음날 ‘서울환경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스톱(Stop)>을 보았는데 정말 무서웠다.

<스톱>은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 당시 지역 주민인 젊은 부부의 임신과 이를 둘러싼 갈등을 다룬다. <곡성>이 단순한 귀신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공포(귀신)보다 인간 자신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의 원인은 언제나 우리 내부에 있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피해를 공유하는 윤리

여성의 출산과 자기 결정권, 사고 지역의 고립, 에너지 소비의 계급성(전기로 돈을 버는 사람과 그로 인해 삶이 파괴되는 사람), 어린 피해자를 향한 또래들의 이지메, ‘기형아’에 대한 공포, 일본 정부의 태도, 감독 특유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묘사…. 이 모든 이슈에 관심 있는 나로서는 매순간이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사고 지역에 몰래 들어가 돼지고기를 도축하여 도쿄 중심가 음식점에 내다파는 청년의 이야기가 좋았다. 남자 주인공이 청년에게 “미친 놈, 범죄자”라며 고발하겠다고 소리치자, 그는 “온 국민이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알고 먹을 사람은 없으므로 자기가 몰래 ‘먹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했다. 감독은 타인의 고통을 ‘마음’으로 공감하는 윤리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피해를 ‘행동’으로 공유시키는 윤리를 제안한다. “전기는 도쿄에서 쓰는데 피해는 왜 우리가 봐야 해!” 이는 “다 같이 망하자”는 논리가 아니다. 원전 자체를 없애야 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므로 일시적인 ‘해결’은 피해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행하는 사람(주체)과 당하는 사람(대상)의 구분을 없애고 타자(他者)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실험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국외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전체의 동등한 일부,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불행은 남의 일이다. 나에게 일어날 리 없다. 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희망이 없다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손쉬운 발상인 저항이나 진실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의 위치를 질문한다.

문제는 ‘도쿄’와 ‘서울’이, 특정 지역(후쿠시마, 밀양, 강정…)에 위험 시설을 건설하여 끊임없이 내부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한국사회는 문제가 생기면 은폐(그것도 대충), 책임자의 거짓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림, 여론이 조용해질 때까지 방관, 소 잃고 외양간 안 고치기, 피해자 고립을 대책으로 삼는 나라다. 진상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를 고사시키고 문제를 떠넘긴다. 통치 세력은 이 문제에 관한한 대단히 발전된 메커니즘과 언어를 갖고 있다.

희생양을 생산하는 방식은 타인과 완전한 단절을 추구하면서 교집합을 제거하는 것이다. 타인을 나의 외부, 부정(否定)으로 설정한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인간사가 작동하지 않는 시대다. 타인의 기쁨은 시기와 스트레스이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짜증을 낸다. 슬픔은 소비의 적이다. 권력은 희로애락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 시민만을 보호한다. 이처럼 기쁨과 슬픔을 자율적으로 나눌 수 없게 될 때,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피해를 특정인의 몫으로 치부하지 않고 “바로 당신의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필요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뜻하는 용어, ‘필요악’. 인식과 문법 면에서 모두 틀린 표현인데, 사회는 이 말을 좋아한다. 불의와 불평등을 손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성매매, 누가 군대에 갈 것인가 등의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일상에서 가장 만연한 필요악 논리는 아마 성매매일 것이다. 성매매는 필요악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필요하고, 누구의 입장에서 악이란 말인가. 필요도 악도 모두 남성의 시각이다. 악은 악일 뿐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제도화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필요한 악’은 없다.

군사주의를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들 중 일부는 징병제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군대를 없앨 수는 없으므로 지원병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도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사람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로 신분 질서가 정해진 판에 지원병제가 되면 어떤 계층이 군대에 가겠는가? 군대는 더욱 계급화, 게토(ghetto)화될 것이다.

방사능 생선을 먹어도 된다고 TV에 나와 시식하는 일본 총리의 모습은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문제가 없다면 증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 정부는 이런 속임수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가 슬퍼하느니 “산 사람이라도 살자”고 주장한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생각이 문제의 근인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 가기 싫은 군대, 환경 오염된 미군기지…, 해결할 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한다. 그래야 개선된다. 자기 집에 물난리가 날 때, 기름이 유출될 때, 자식이 군대에서 자살할 때, 세월호에 탔을 때‘만’ 권력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불행하지만 이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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