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영화’의 피로

2017.11.16 20:59 입력 2017.11.16 21:14 수정

영화 <범죄도시>에서 경찰들이 조선족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장면.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범죄도시>에서 경찰들이 조선족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장면.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범죄도시>의 누적 관객이 650만명을 넘었다. 이런 기세라면 700만명도 훌쩍 넘지 않을까 싶다. 2017년 가을 추석, 성수기 영화로 개봉할 때만 해도 <범죄도시>의 흥행을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지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기시감이다. 어떤 형사가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 자체가 한국 영화에서 너무 많이 다뤄지고, 너무 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이유를 더 보탠다면,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범죄도시>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 조직폭력배를 악의 축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의 폭력행위가 심상치 않다. 도끼, 망치 등 가리지 않고 휘둘러댈 뿐만 아니라 신체 훼손의 정도도 무척 심하다.

한국 영화계에서 ‘청불 영화’, 그러니까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불 영화’ 하면 언뜻 선정적인 장면들, 즉 야한 영화가 떠오르지만 실상 한국 개봉 영화 중 청불 영화는 성적 표현 수위 보다는 폭력성으로 규정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대개의 한국 청불 영화는 미성년자가 보면 위험할 정도로 매우 폭력적이라는 의미다. 짐작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신세계> 이후 한국 청불 영화사상 가장 흥행이 잘 된 영화라는 <범죄도시>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는 없다. 술과 도박처럼 범죄의 배경으로 러시아 여성, 한국 여성들이 등장한다. <범죄도시>에서는 그나마 마동석의 캐릭터를 부각하는 도우미로서 등장하는, 일종의 소도구에 가깝다.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극도로 잔인해진 한국 대중 영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에서 범죄 세계의 잔혹한 묘사는 어느새 특별한 게 아닌 평범한 클리셰이자 주류 영화의 상식적 문법이 되어 버렸다. 회칼이 난무하고, 신체 주요 부위를 훼손하거나 아예 없애는 장면이 등장하기 일쑤며, 심지어 개를 살상용으로 사육하고 사람을 개 먹이로 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특정한 작품 하나가 아니라 여러 영화에서 일종의 관습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더 킹>의 맹견 살상 장면은 <미옥>에도 등장하고, <신세계>의 시신 유기 방식은 <내부자들>에서 조금 변주된 방식으로 활용된다. 가만 보자면, 범죄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죽을 사람과 곧 죽을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 범죄 영화는 그 사회의 엄혹함과 폭력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경제의 성장과 함께 미국의 조직범죄 영화가 성장했듯이 어쩌면 만연한 범죄 영화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그 이면이 조직폭력배의 구조와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검사나 정치인이 등장하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조직범죄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별시민> <더 킹> <검사외전>에 묘사된 공인들의 모습은 <부당거래>나 <짝패>에 그려진 조직폭력배 출신 사업가들 모습과 구별하기 힘들다.

결국 한국에서 ‘되는 영화’는 모두 범죄 영화의 꼴을 하고 있다. 공무원을 그리든, 지하경제를 그리든, 인생의 허무와 모성애를 그리든 이 모든 주제들이 다 되는 영화, 범죄라는 스펙트럼을 거쳐 재조명되고, 해석되고,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쏠림 현상과 함께 관객들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최근 정치판을 조직범죄로 그리거나 조직범죄 잔혹성을 폭력적으로 재현하는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낮아지기도 했다. 잔인한 조직범죄 영화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되는 영화’의 피로

하지만 마동석이라는 배우, 캐릭터의 매력에 기댄 <범죄도시>의 성공은 결국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는 여전히 잘된다는 확신으로 증폭되지 않을까 싶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투자자들은 일종의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해석해, 폭력성을 되는 영화의 주요 성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된 영화가 폭력적이었다가 아니라 폭력적인 영화여야 잘된다고 오해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미다.

자르고, 찌르고, 부수고, 훼손하는 이 폭력적 장면들이 범죄의 박진감을 높이는 필연적 장치일까? 역설적이게도 한국 영화의 등급 기준을 보자면 노출에는 무척이나 엄격하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부분이 없지 않다. 무릇 선정성이란 비단 성적 욕망의 자극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이야말로 사람의 감정을 흔들지 않던가? 폭력에 대한 감도를 낮추고, 폭력에 익숙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외설은 아닐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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