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조금 벗어나도 괜찮은

2018.04.02 21:17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과장

“나 주말에 차이나타운 갈 건데 짜장 빙수는 어디에서 팔아?” 친구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런 건 처음 듣는다고 하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지역민이 모르는데 관광객만 아는 ‘명물’이란 대개 빛 좋은 개살구이거나 별것 아닐 확률이 높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차이나타운 근처에서 일하게 됐을 때 처음에는 동네의 모든 집을 가봐야겠다 다짐했고, 어디가 가장 맛있는지 알아내고 말겠다는 각오로 많은 집을 가봤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맛집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굳이 줄을 서고 긴 기다림을 감수하면서까지 먹어야 할 만큼 맛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할뿐더러, 유명한 곳이라며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식당은 오히려 피해 다닌다.

[직설]여행, 조금 벗어나도 괜찮은

요즘 많은 TV 프로그램에서 여행을 다루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맛집 메뉴를 세세하게 보여주고, 유명한 음식 아이템은 비교분석까지 해준다.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넘쳐나다보니 여행 역시 간접체험으로 사전 확인을 마치고 떠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기내식은 물론 한국인이 많이 간다는 휴양지 리조트의 룸서비스 메뉴와 가격, 먹을 만한 메뉴까지 검색 몇 번으로 알 수 있는 세상이다. 폭풍 검색을 하고 떠나면 자유여행이어도 패키지 여행처럼 예측 가능한 여행을 다닐 수 있다. 요새 유행한다는 ‘언박싱’(unboxing·상자를 연다는 뜻으로 제품의 개봉 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의미하기도 한다)과 비슷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언박싱 영상이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여행의 경우 ‘○○ 가봤니’ ‘○○ 가면 꼭 가야 할 맛집’ 등으로 그대로 따라 해도 될 법한 일종의 가이드북으로 기능한다. 엑기스만 뽑아 보여주는 영상을 보다 보면 현지 맛집에서 뭘 먹게 될지, 먹으면 어떤 맛일지, 한국인 입맛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조차 예측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맛집 도장깨기’처럼 “나도 거기 가봤다”에 의의를 두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실패는 돈 낭비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힘들게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온 여행에서 불확실한 건 용납할 수가 없는 거다. 실패하지 않을 코스만 골라 가성비 좋은 만족감을 구매하려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일상과의 간격을 만들어내는 여행에서조차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면, 새로 구입한 물건 상자를 뜯는 것처럼 명확하다면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실제로 동남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현지에서 꼭 가봐야 한다는 레스토랑에 갔더니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이 꽤 있고, 여기저기서 유창한 한국말이 들려온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에도 줄줄이 한국인들이 들어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는데 데자뷔가 따로 없다. 블로그에 많이 나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국 사람들만 오는 곳일 줄이야…. 또 다른 레스토랑에서는 아예 종업원이 “한국 사람들 먹는 메뉴는 이거”라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메뉴 몇 개를 골라줬다. 블로그에서 본 메뉴랑 똑같다. 조금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런 영상이 활성화되기 전에 가봤던 오키나와 여행에서 기억나는 것은 꼭 가봐야 한다는 수족관이 아니었다. 블로그에도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던 동네 술집에서의 저녁이었다. 한국에서 온 우리, 막 퇴근한 중년 일본인 회사원, 중국에서 온 가족 손님까지 둘러앉으니 좁은 선술집 테이블은 꽉 찼고, 몇 개 되지 않는 안주 메뉴에서 절묘하게 다른 안주를 선택하는 걸 보며 신기해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어떤 술을 마실까 고민하던 우리에게 꽤 유창한 영어로 술에 대해 설명해주던 일본 손님과 부딪쳤던 술잔의 소리까지도….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지 카페에서 읽었던 책의 한 구절, 어쩌다 발견한 맛집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떠올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때로 여행은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기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듯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풍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4월, 본격적인 여행 시즌이 다가온다. 떠나려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다 풀어놓은 상자를 나도 개봉하는 데 의의를 두는 여행보다, 나만의 상자를 새롭게 발견하는 여행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여행에서만큼은 조금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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