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와 방탄소년단

2018.06.03 21:23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내가 팝송을 듣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존 덴버의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가 첫 번째 노래였다. 들리는 대로 그저 따라불렀다. 영어 공부도 할 겸 팝송 가사를 구해서 적는 착실한 친구도 더러 있었으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 아이들은 정확한 발음도, 가사 내용도 모른 채 그냥 듣고 흥얼거렸다. 몰라도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선]딴따라와 방탄소년단

세 살 때 캐나다로 살러온 우리 딸아이가 케이팝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지루해서 그랬는지 한글학교 가기를 줄곧 꺼리던 아이가 그즈음 우리 말과 글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케이팝 때문이었다. 아이는 기특하게도 착실한 어릴 적 내 친구들처럼 케이팝 가사를 적으면서 우리 말과 한글 실력을 키워나갔다.

아이는 곧 케이팝의 ‘열혈 팬’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된 2011년부터였다. 그해 10월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SM타운 라이브 월드투어 인 뉴욕> 공연에 가고 싶어했다. 나는 딸을 태우고 10시간을 넘게 운전해서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모르던 세계가 있었다.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소녀시대 에프엑스 샤이니 등 SM 소속 한국 가수들의 뉴욕 데뷔 공연인데 1만5000여 객석은 외국인 팬들로 가득 채워졌다. 맨해튼 거리에 홍보 포스터 한 장 붙지 않았었다. 온라인으로 티켓을 발매하자마자 단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했다. 그 표를 쥐고 22시간 버스를 타고 온 여대생 팬들도 있었다.

그 공연 이후 딸아이는 케이팝 팬으로 거듭났다. B.A.P라는 보이그룹을 좋아하면서부터 전 세계 팬들과 온라인으로 교류했다. 토론토 팬 수백 명은 커뮤니티센터를 빌려 정기적으로 행사를 열었다. 영상과 음악 위주로 이루어지는 그 모임에서 한국 아이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소셜미디어를 만난 케이팝은 물을 만난 물고기 같았다. 북미 젊은 대중을 얼마나 빨리 그리고 깊이 사로잡았는지 토론토에 사는 나도 놀라울 정도였다.

2012년 전 세계를 춤추게 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케이팝은 정점을 찍고 하향 추세로 접어들 것이라는 예측이 미국에서 나왔다. 공장 시스템으로 제작·관리된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꼽혔다. 그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싸이를 통해 케이팝 저변이 넓어지자 새로운 팬들이 케이팝 세계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형 기획사 SM·YG·JYP 소속이 아닌 낯선 보이그룹에 열광했다. 방탄소년단(BTS)이다. 빌보드200 차트 1위를 차지한 방탄소년단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딴따라’ 소리를 들으면서도 지난 100년 가까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우리 대중가요의 저력이 방탄소년단을 통해 드러났을 뿐이다.

요즘 세계 젊은 대중은 중·고교 시절 내가 팝송을 듣고 따라 부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케이팝을 즐긴다. 카세트테이프 녹음기에서 스마트폰으로 기기만 바뀌었다. 최근 뉴스를 보면 한국에서는 유독 정치권에서만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대학생들과의 만남에서 “판문점에서 조용필이 불러갖고 노래하고 생쇼하는 것 보세요”라고 말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 또한 어느 언론의 북한 관련 기사 논평에서 “연예인 스캔들 기사에도 적용되는 크로스체크가 왜 이토록 중차대한 일에는 적용되지 않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우리 대중음악가(연예인)들은 지금 정치인들이 그렇게 쉽게 호출하여 은근히 비교 폄하할 만한 딴따라가 더 이상 아니다. 한국 문화를 세계에 이들만큼 널리 알린 한국인은 지금까지 없었다. 50년을 한결같이 우리 국민을 즐겁게 하고 위로해준 국민가수가 조용필이다. 50년은커녕 단 5년이라도 조용필만큼 우리 국민을 행복하게 해준 정치가가 있기는 했는가. 한국 이미지를 우리 가수들만큼 드높인 정치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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