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그때 그곳에서”의 힐링

2018.10.23 20:26 입력 2018.10.23 20:27 수정

[정희진의 낯선 사이]“딱 그때 그곳에서”의 힐링

올해 노벨 화학상은 세 명의 영미권 학자에게 돌아갔다. 가장 연장자인 미국 미주리 대학교의 조지 P 스미스(77)의 수상 소감이다. “거의 모든 수상자가 자신이 받는 상은 ‘딱 그때 그곳에 있었기에’(강조는 필자) 활용하게 된 수많은 아이디어와 연구, 전례 위에 쌓인 것임을 알고 있다. 노벨상에 이르는 연구는 매우 적고, 사실상 전부가 이전에 진행됐던 것에 기반을 둔 것이며 수상은 우연(happenstance)이다. 내 연구도 기존의 연구 위에 자연스럽게 구축된 것이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딱 그때 그곳에서”의 힐링

대개 이런 말은 겸손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시상식장에서 영화배우들이 “많은 스태프들의 도움이 있었다” “나는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얹었을 뿐이다”라는 소감처럼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타인에게 공을 돌리는, 그런 겸손 말이다. 영화의 완성 과정도 그렇겠지만, 수천 년 이상 지속된 과학 연구에서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독자적인 업적일 수 없다.

과학자는 “우연”이라 말했지만, 인문학에서는 “부수적 사건(contingency)”이라 표현한다. 같은 말이다. 부수적(附隨的)이 ‘좀 더 겸손’하다고 할까. 노벨상 수상은 학문 전체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일 뿐이다. 수상자는 ‘하필’, “딱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받게 된 것이다. 정확한 자기 인식이다.

모든 과학자가 이런 수상 소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서구 사회 연구자들은 모든 자원이 부족하다. 물론,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말,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이 이야기도 뉴턴이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여성주의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뉴턴의 말을 약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가 아니라 ‘발’ 아래서 세계를 처음 접한다, 사회적 약자는 이미 출발선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출발선이 위로가 된다. ‘우리는’ 어깨 위에서 시작한 이들보다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인도의 철학자 메타(J L Mehta)는 이렇게 말했다. “동양에 있는 우리에게 길은 유럽을 지나는 길 외에는 없다. 이국적인 것, 이질적인 것을 항해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길은 가장 길게 돌아가는 길이다.” ‘인도’가 자신을 알기 위해선 ‘영국’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연은 흔히 생각하듯 비합리적이거나 불공정한 운이 아니다. 필연의 반대말은 더욱 아니다. 우연과 필연은 무관하다. 필연은 불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생에 “반드시”는 있을 수 없고 법칙대로 되는 인간사도 없다. 역사는 전사(前史)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다. 우연은 그 해석의 유동성이 낳은 ‘필연’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미래(未來)는 글자 그대로 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집단이나 개인이 고달픈 이유는 미래를 몰라서가 아니라 과거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힐링은 삶의 앞뒤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회적 문맥을 고려하면, ‘성공’에 따른 도취도 ‘실패’에 따른 좌절도 상대화된다. “딱 그때 그곳을 지나가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져 자신에게 차례가 오는 것뿐이다. 이것은 소박한 기쁨일 수도 엄청난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인생에는 법칙이나 인과 관계가 없음을 어찌하랴. 내 성공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잘나서”라는 자만에 빠지기 쉽고, 고통의 원인을 찾다 보면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다.

개인의 행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회적 상황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얘기다. ‘금수저 개인’만이 승자가 되는데도, 경쟁과 승부가 강조되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역사적 사유(우연, 부수적 상황)가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개인의 극한 노력과 구조의 양극화라는 불공정 게임이 동시에 존재한다. 승패가 정해진 사회에서는 과정조차 의미가 없다. 이제는 과정도, 결과도 아닌 전제를 따져야 한다. 개인의 힘으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여전히 개인의 성취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이들이 낙오자 정서에 시달린다. ‘셀럽 문화’가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실제 개인의 삶은 철저히 구조 속에 갇혀 있는데도, 개인의 노력으로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좌절한 개인들은 관종(‘관심 종자’, 지나치게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기 쉽고, 인간관계는 이들의 자기도취와 허언증으로 파괴된다.

행과 불행, 성공과 실패, 질병과 상실의 고통… 이 모든 것이 내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라 거대한 역사의 부수적 사건이라면, 나는 그저 망해가는 지구의 나그네라고 생각하면, 덜 괴롭지 않을까. 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역사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내가 추구하는 일을 하면서 역사를 흘끗 보자. 힐링은 딱 그때 거기를 지나간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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