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2020.05.30 03:00 입력 2020.05.30 03:03 수정

뮌헨의 한 지방법원 법정 앞. 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다. 그는 며칠 전 법원으로부터 자신을 상대로 제기된 민사재판에 참석할 것을 통지받았다. 통지받은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그는 법정 정리에게 자신이 도착하였음을 알리고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법정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가득하였기에 법정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의 사건이 시작되면 당연히 자신을 부르리라 생각했다. 기다림이 두 시간을 훌쩍 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법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이 불출석 처리되었고, 그로 인해 재판이 패소로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주머니는 상소했다. 대법원조차도 1심 법원 판단이 정당하다고 했다. 법정에서 피고를 불렀으므로 불출석 처리를 한 것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김진한 헌법전문가·독일 에어랑엔대 방문학자

김진한 헌법전문가·독일 에어랑엔대 방문학자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1976년 겨울, 헌법재판소가 판단했다. “이는 헌법과 기본권을 명백하게 침해하는 재판이다. 그가 법정 안에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패소 판결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관료주의적 사법판단이다. 재판을 시작할 때 당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지 재판 진행을 위한 절차만이 아니다. 당사자에게 자신의 권리행사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법원이 편의를 위하여 십여 건의 사건을 묶어 하나의 절차에서 재판하는 경우라면 더욱이 법정 밖에 찾아가서 부르고 구내 스피커라도 활용해야 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였다. 법원의 이런 형식적 판단은 스스로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지를 잊은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법원에 출석한 당사자라면 단지 법원의 재판 진행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 판단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평등 침해, 정의의 원칙 위반인 것이 사법을 운영하는 법관들의 눈에는 소송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이것은 1976년 독일의 법원에서만 발생하는 문제일까?

우리 사법권력은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사법의 편의주의, 권위주의 시대의 판례가 민주공화국의 최고법인 헌법과 기본권을 압도한다. 전관예우라는 부끄러운 폐습, 판결문의 비공개, 법원행정의 관료주의는 이제 전통이 되었다. 권력은 견제받아야 부패하지 않는다. 사법권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법부의 견제는 자칫 사법의 독립을 해칠 수 있다. 사법의 독립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독일에서는 그 역할을 헌법재판소에 맡기고 있다. 헌법과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원의 재판을 헌법재판소가 취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법의 독립과 사법권력의 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균형 잡힌 권력통제장치가 되었다. 우리 사법부는 이 제도를 단연코 거부한다. 대법원의 위상을 헌법재판소 아래에 굴종시키는 제도라는 이유에서다. 시민들은 사법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법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법원의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은 어느 기관을 억누르거나 우월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사법권을 다시 국민의 품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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