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불꽃

2021.02.05 03:00 입력 2021.02.05 03:02 수정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의 한 장면.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의 한 장면.

“ ‘태어나기 전 세상(The great Before)’의 영혼들은 상처 입지 않아. 상처는 태어난 이후 지구에서 생기는 거지.”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Soul)>은 관객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시공간을 소개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소울>에는 여러 기발한 착상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무아지경의 순간이다. 무아지경에 이르는 그 순간, 망각 속 미지의 시공간과 접속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물아일체의 방법이다. 뉴욕 번화가의 어느 모퉁이에서, 간판을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돌리는 아저씨나 요가 수행자, 연주자 등이 자기 일에 몰두할 때, 소위 유체이탈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 일이 무엇이든 몰입할 때, 그때 저 너머 세상에 닿는다.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달인들이나 백반 쟁반을 몇 개씩 정수리 위로 쌓아 올리고 움직이는,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숨은 고수들처럼, 꼭 순수예술이 아니더라도 숙련된 노동의 순간에도 무아지경은 일어난다.

이는 <소울>의 중요 개념인 ‘불꽃’과도 연결된다. 아직 비정형 상태인 영혼이 세상에 나가기 위해선 나름의 불꽃이 필요하다. 문제는 태아의 발육처럼 알고리즘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자기만의 고유한 불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가 쉽진 않다는 것이다. <소울>은 삶의 불꽃이란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이 바로 살아가는 이유이며 그것이 곧 삶의 불꽃이라며 평범한 삶을 격려해준다. 불꽃은 찾는 게 아니라 곁에 있는 것이라고도 넌지시 말해준다. 삶의 세목일 뿐 불꽃찾기가 목적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운 불꽃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나란히 두고 보면 어쩐지 허망하게 들리기도 한다. 이태겸 감독의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말이다. 삶의 불꽃은 그래도 최소한의 삶의 지위, 살아갈 여건은 마련된 상태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영화를 보다 보면 절실히 깨닫게 된다. 불꽃은 그나마 발을 딛고 설 최소한의 터전이 있을 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여유이니 말이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정은(유다인)’은 파견 근로를 요구받는다. 말이 파견이지 사무직 노동자였던 정은에 대한 우회적 사직 압박에 불과하다. 일부러 숙련되지 않은 현장직에 정은을 보내 겁주는 것과 다름없다.

심지어 정은에게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송전탑에 오르거나 사직서를 내거나, 모서리에 몰린 정은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막내’라 불리는 송전탑 노동자이다. 정은은 그의 도움으로 차츰차츰 송전탑을 배우고, 한발씩 기술을 터득하게 된다. 막다른 길에 몰렸던 정은의 삶에 이웃 노동자, 막내가 불꽃을 선사해준 것이다.

일상다반사에 대한 겸손하고 감사한 태도가 불꽃이라는 점엔 동의하지만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와 같은 상황 속에선 태도란 형이상학적 수식어에 불과하다. 불공정한 노동 현장이 가장 먼저 꺼트리는 것 역시 바로 그 내면의 불꽃, 인간다움이다. 절차적으로는 빈틈없는 근무평가나 행정을 통해 시스템은 인간적 자존감부터 무너뜨린다. 사람을 자꾸 잉여인간이나 무능력자로 몰아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감전 예방 작업복조차 손수 마련해야 하는 비윤리적 노동 공간에서 삶에 대한 관용이나 무아지경을 논할 수는 없다. 송전탑 노동으로는 부족해 대리운전, 편의점 야간 알바까지 하는 막내에게 노동은 무아지경은커녕 노동에 영혼마저 담보 잡힌 혹독한 현실이다. 그런 그에게 내면의 불꽃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은 사치다. 내면의 불꽃이 딸아이들의 먹고살 권리를 보장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마다 잊지 말자고 노동 현장에서 사라진 젊은이들의 이름을 되뇐다. 중대재해처벌법과 같은 엄격한 법적 제동 장치에 희망을 걸어 보지만 늘 실현 앞에서 주춤거린다. 생계를 위협하는 기형적 권고사직의 흉흉한 소문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불꽃은 언제나 노동의 세계에 있었다. 다만 그것이 분노의 푸른 불꽃일 뿐. 정은의 불꽃은 저 혼자서 송전탑을 오를 때, 추락했으나 허리에 매달린 안전선을 놓치지 않을 때, 정당한 요구의 목소리를 높일 때, 그때 푸르게 타오른다. 열이 높을수록 더 푸르러지는 불꽃처럼, 그렇게 퍼렇게 벼린 불꽃으로 삶은 지탱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엔 퍼런 분노의 불꽃이 더 필요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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