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메아리

2021.11.08 03:00 입력 2021.11.08 03:03 수정

꾹꾹 눌러가며 원고지를 메꾸던 일은 한참 전부터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얀 종이를 앞에 놓고 세심하게 연필을 깎던 글쓰기 전 리추얼 역시 “글 쓸 때 좋은 음악” 정도의 플레이리스트를 찾는 것이 대신합니다. 준비가 되면 문단을 완성할 때마다 글자 수를 세어가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나름의 주장을 담은 모여진 문장들이 네트워크를 타고 전해지면 그 이후의 몫은 읽는 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쌓인 글들이 활자로 번듯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상상하면 소심한 성격에도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닙니다.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

어쨌든 글을 쓰는 행위는 온전히 혼자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작은 방에 앉아 빈 화면을 바라보다 문득 쓰는 이에게 즐거움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기고가 인쇄된 지면을 어머니는 가위로 찬찬히 오려 하나씩 스크랩하십니다. 얼굴도 자주 보기 힘든 자식이 글로 찾아뵈니 노모의 마음에는 두 배의 반가움이 다가옵니다. 종이 위의 아들은 흑백사진으로 몇년째 나이도 먹지 않습니다. 만나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녀석이 풀어내는 마음속 이야기에,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이 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는 아들은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 내려놓습니다.

처음 책을 내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두꺼운 종이 묶음의 겉에 새겨진 이름 석자는 미리 고른 표지 위에서 생경하게 다가왔습니다. 찬찬히 넘겨보는 페이지마다 인쇄된 글자는 이제 고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독자들에게 날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찾던 서점을 한동안 가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왠지 자신의 책을 만지는 모습을 누가 알아볼까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어 찾은 서점의 매대에 남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아래 서가에서 몰래 꺼내 포개어 올려놓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얼굴이 붉어집니다.

얼마 전 한 회사의 사내 방송에서 새로 낸 책 소개를 청하셔서 다녀왔습니다. 짧은 시간에 무엇을 전할까 궁리하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은 그곳에 있는 제 책에 촘촘히 붙어있는 견출지였습니다. 펼쳐본 책에는 청하신 분께서 미리 읽고 남긴 밑줄과 노트가 가득했습니다. 그중 몇개를 골라 제가 직접 읽으며 그 문장들을 쓰기 위해 궁리했던 생각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분의 흔적으로 제가 쏘아올린 화살이 어떻게 독자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소상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읽어주신 분에게 제가 어떤 고민으로 그 문장을 만들었는지 설명해 드릴 수 있었기에 더욱 기뻤습니다.

이제는 직접 만나지 않아도 이런 교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블로그와 트위터, 인스타그램으로 책을 읽은 분들이 자신이 주목하는 문장들을 꾸준히 올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더해서 자신의 생각과 제 의도를 유추한 해석까지 설명해주십니다. 제가 보낸 신호가 조난당한 배 위의 작은 불빛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공명됨을 느끼며, 이것이야말로 글쓴이가 누릴 수 있는 작지 않은 기쁨이라 생각했습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같은 문장을 주목하여도 각자의 소회는 저마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읽은 이의 마음의 거울을 통해 반사된 신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느낌에 의해 해석된 후 보내지기에, 신호를 보낸 이는 같을지라도 반향은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은 모습과 색깔들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불빛이 읽은 이들의 생각이 더해져 더욱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메아리처럼 돌아온 선명한 불빛 속 마음들을 캐내며 또다시 우리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글쓴이 저의 행복은 조금씩 더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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