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자가 필요 없는 사회

2015.01.11 20:28 입력 2015.01.11 20:31 수정

외국 여행을 많이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역사 굴곡이 심한 나라일수록 애국자들이 많다’고. 필리핀에서 그 말을 실감했다. 유럽의 선진국들은 정복자나 철학자, 시인들의 유적이 많지만 필리핀은 수도 마닐라부터 시골 동네까지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애국자들이 공원과 거리에 동상으로 서 있었다. 19세기 말 스페인에 저항해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항거한 투사 등 시대는 다르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비장한 사연은 한결같았다. 그런 필리핀이 여전히 힘들고 가난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아침을 열며]애국자가 필요 없는 사회

애국자가 많은데 나라는 왜 어렵고 사람들 삶은 힘든 것일까. 이 질문은 우문이다. 애국자가 많은데도 나라가 어려운 게 아니라, 나라가 어려운 탓에 애국자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필리핀 사람들이 굳이 자신을 희생하며 저항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애국자 수가 필리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 학도병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책 대신 총을 들었고,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렸다. 이런 분들 덕분에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고, 독재정권은 물러나게 됐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도 일궈냈다. 독일에 간 광부와 간호사, 월남 파병 병사들이 벌어온 돈을 산업시설에 투자해 1953년 13억달러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을 2013년 1조3043억달러로 1000배 이상 불렸다.

나라가 평안하고 잘살게 되면 애국심과 국가관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이나 월드컵·올림픽 같은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가 없다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는 일이 많지 않다. 국산 담배를 애용하지 않고 외제를 피운다고 손가락질하던 게 10~20년 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도 제품의 질과 서비스로 승부할 뿐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을 펼치지 않는다.

하지만 애국심의 퇴조를 애석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건전한 시민의식으로 메우면 된다. 따지고 보면 애국심은 선(善)이라고 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무엇보다 애국심은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국가와 조직이 개인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논리는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리다.

애국심은 또 주변 나라들을 불편하게 한다.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고 평화 헌법을 무력화하려는 일본 우익의 애국심은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 자주 발생하는 폭탄 테러도 극단적 애국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 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애국심이 최고조에 이른다는 사실은 애국심의 본질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국심이 정권이나 정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 나치 독일이나 북한이 대표적인 예다.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정부와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고, 최고 지도자에 대한 숭배로 연결된다. 남한에서는 반공·반북이 애국으로 포장됐다. 기성세대들이 자다가도 외우는 국민교육헌장에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고 언급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애국을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연말 청와대에서 주재한 핵심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애국가에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런 가사가 있지 않으냐”며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장면을 언급하며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퍼지니까 경례를 하더라”라고도 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충(忠)이 무엇인가. 중심(中心)이다. 중심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면서 국가와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던 박근혜 정부가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이 다소 이해되지 않는다. 애국과 충성이 나라 발전의 밑거름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2015년 대한민국에서 애국심과 자기 희생이 필요한 사람은 정작 따로 있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그리고 세금을 깎아주거나 규제를 풀지 않으면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겠다고 하는 재벌·대기업 총수들이다. 이들이 사리사욕을 버리면 일반 국민은 나라 걱정할 일이 크게 없을 것이다. 새해 아침, 애국자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사회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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