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회고록 전문 단독 입수

“북 보위부 간부, 정상회담 논의하러 서울 왔다간 후 공개처형”

2015.01.29 06:00

남북정상회담 무산

천안함 때 ‘몇 배 응징’ 생각… 증거 찾느라 50일, 결국 포기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무산 전말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정부는 통일부는 물론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북한 측과 수차례 만나며 정상회담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북한이 1000억원 상당의 도로 건설 재료 등을 요구해 결국 무산된 것으로 28일 드러났다.

■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

“2009년 8월23일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을 청와대에서 접견했다. 인사가 끝나자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했다. 나는 남북정상회담이 과거처럼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언급하지도 못하면서, 대북 지원 논의만 하는 것이라면 회담을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2009년 10월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싱가포르에서 우리 측 인사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통보해왔다. 북한 핵 문제,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등을 주요 의제에 포함시키되,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성 지원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침으로 확정했다. 장소는 북측 희망에 따라 유연성을 보이도록 했다.”

“북한은 임태희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세 장짜리 합의서라는 것을 들고나왔다.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이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의 식량을 비롯하여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북 인사 서울 방문 후 처형

“2010년 6월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메시지를 보냈다. 국정원 고위급 인사와 접촉하고 싶다는 요구였다. 7월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방북했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요구하자 북측은 ‘(당사자가 아닌) 동족으로서는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2010년 12월5일 북측 인사는 비밀리에 서울로 들어왔다. 대좌 1명, 상좌 1명과 통신원 2명을 대동했다. 양측은 협의 끝에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2011년 초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와 접촉한 북측 인사가 공개처형됐다는 것이다. 당시 권력 세습을 준비하고 있던 김정은 측과 군부에 의해 제거됐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 중국도 남북정상회담 권유

“2011년 5월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원자바오가 이렇게 말했다. ‘오랜 친구로서 저는 대통령께서 결심을 내려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사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북한은 과거 전례대로 대가를 요구해왔습니다. 북한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정상회담을 구걸하는 것이 됩니다. 남북관계도 정상화될 수 없습니다.’”

■ 천안함 사건 후 응징 고려

“북한 소행임이 밝혀지자 나는 응징 조치를 생각했다. 군 수뇌부도 천안함 폭침 몇 배에 해당하는 응징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증거를 찾는 데 50일이라는 시간이 소모됐다. 무력 조치를 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무력 조치는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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