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통 큰 사회환원에 가려진 이야기들

2021.05.15 13:16 입력 2021.05.15 13:44 수정
이종란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노무사

지난 2017년 3월 수원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삼성전자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행진이 열렸다. 강윤중 기자

지난 2017년 3월 수원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삼성전자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행진이 열렸다. 강윤중 기자

지난 4월 28일은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이었다. 이날 노동계는 기업의 소홀한 안전 대책으로 노동자들이 아직도 매일 6명씩 죽어가는 현실을 알리느라 바빴다. 기업이 조금만 노동자의 생명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살릴 수 있었던 무고한 목숨들이 이날만큼은 주목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주목을 받은 뉴스는 따로 있었다.

“아직도 삼성전기에서 소식은 없지요?”

이날 삼성은 이건희 회장 유산 상속세 12조원 납부 계획과 의료사업 지원, 미술품 기증 등을 발표했다. 방송·신문 등 언론은 일제히 이를 톱기사로 전했다. 언론은 “기부 역사 새로 쓴 삼성”, “통 큰 사회환원”, “이건희의 마지막 선물” 등의 찬양일색 제목으로 보도하기 바빴다. 진작 지켰어야 하는 납세의 의무를 뒤늦게 지키는 것을 비판하기보다는 통 큰 사회환원으로 미화돼 집중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볼썽사나웠다. 이 특별보도를 TV로 접한 노년의 한 어머니는 당연한 의문을 품고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에 전화를 걸었다. “저 혹시 삼성전기 백혈병 피해자 보상 소식은 없나요. 삼성이 사회환원을 한다는데….”

이어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씀을 이어갔다. “딸이 삼성전기 조치원공장에 다니다가 2005년 백혈병으로 갔는데 아직도 삼성전기에서 소식은 없지요? 아이고 내 새끼…. 그런데 나는 참말로 자식을 잃고 다 망가졌어요. 뇌경색도 오고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요. 한이 됩니다. 잠을 못 자요. 두 번 세 번 죽으려고 약도 먹고 했는데…. 새끼가 왜 이렇게 철도 일찍 나고, 엄마·아빠 고생 안 하게 해준다고 그렇게 애정을 쏟았나…. 돈이 없어 그렇게 가고 싶은 대학을 못 보내니 한이 되지요.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더니 그렇게 한이 되네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미안해졌다. 2018년 반올림은 10년에 걸친 지난한 싸움 끝에 삼성전자의 양보를 얻어냈다. 삼성전자 반도체, LCD사업부 직업병 피해자에 대해 대표이사의 공개사과를 받고, 독립적인 지원보상위원회를 통한 피해자 보상과 안전보건공단 산하에 전자산업안전보건센터를 건립해 하청노동자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예방대책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성전기, 삼성SDI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회사가 다르다는 이유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당시 반올림도 가장 많은 피해자가 나왔던 삼성전자와의 협상에 주력하느라 계열사 문제를 같이 제기하지 못했다.

다만 2018년 11월 삼성전자와의 합의 당시 황상기 아버지(고 황유미님의 부친, 반올림 협상 대표)는 삼성SDI, 삼성전기 등 계열사 보상 문제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3년이 되도록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삼성이 12조원의 상속세를 내고 통 큰 사회환원을 말하는 지금까지도 삼성은 이 문제를 모른 채 지나치고 있다.

삼성은 잘 알고 있다. 삼성SDI, 삼성전기 등 전자 계열사에서 일한 노동자들도 반도체 공장처럼 백혈병·암 등 심각한 직업병 피해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개인질병이라고 탓할 수도 없게,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삼성전기와 삼성SDI의 백혈병 등 암 피해자들이 몇년 전부터 산재인정을 받고 있다.

책임과 응답을 기다린 유족의 호소

2018년 삼성SDI 천안사업장 노동자가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같은 해 삼성전기 수원사업장 여성 노동자가 만성 백혈병으로, 지난해는 삼성전기 부산사업장 백혈병 사망노동자의 유족과 삼성SDI 수원연구소 백혈병 사망노동자가 산재를 인정받았다.

또한 삼성은 이들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 겨우 20대에 백혈병으로 눈을 감은 자식을 대신해 오랫동안 문제 제기를 해왔던 부모의 존재를 말이다. 안타깝게도 산재보험 청구권이 3년(개정 산재법에 따르면 유족급여 5년)으로 짧기에, 오래전 사망한 노동자 유가족은 산재신청을 하고 싶어도 법적 구제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삼성은 유가족들의 한 맺힌 절규를 못 들은 척하고 있다. 이건희 일가의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인가. 밤낮으로 제품을 생산해낸 노동자들 아닌가.

삼성이 상속세 납부를 하고 의료분야에 1조원 규모로 지원한다고 하니 중앙일보는 “이 회장이 인류사회 공헌과 아동복지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면서 고인의 유지를 살려 기부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 대목에서 정말로 반문하고 싶어진다. 인류사회에 공헌할 돈을 벌어다준 노동자들의 직업병 피해에 대해서는 언제쯤 대책을 마련할 것인가.

2005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SDI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고 박진혁님(28)의 아버지 박형집님은 아들의 죽음 이후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에 이가 전부 다 빠졌다. 2012년부터 죽은 아들 대신해 8년을 SDI 울산공장 앞에서 주 2회씩 1인시위를 했다. 이제는 이틀에 한 번 투석하는 몸이 됐고, 코로나19의 위험으로 더는 1인시위를 나가지 못한다. 다만 그럴수록 절박해진다. “아들의 죽음과 삼성SDI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해 목소리를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아들을 잊지 말아주세요.” 아버지의 호소다.

‘통 큰 사회환원’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할 줄 아는 삼성은 어째서 8년이나 공장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며 책임과 응답을 기다린 유족의 호소를 외면할까. 박형집 아버지뿐 아니라 삼성SDI의 직업병 피해자들은 오랜 기간 사과와 보상 등 대책 마련을 촉구해왔다. 보상과 사과라는 것이 단지 금전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가 일말의 책임을 인정하고,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들이 마음속에만 묻어둔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의 직업병 피해에 대해 삼성은 책임 있게 나서길 바란다. 지금 삼성이 해야 할 일은 이재용 부회장 사면을 위한 여론몰이가 아니라 삼성 계열사 직업병 문제를 비롯해 오래 제기돼온 여러 피해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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