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공소장 속 백남기씨

2016.09.13 18:54 입력 2016.09.13 18:55 수정
최우규 정치·국제에디터

경향신문은 1980년 8월14일자에 1면부터 3면까지 ‘김대중 등 20명 첫 공판’ 기사를 펼쳐놓았다. 또 6면짜리 ‘부록’을 뒤쪽에 실었다. 김대중 내란음모죄 공소장 내용이다.

부록 4면에 시인·소설가 송기원의 공소 사실이 적혀 있다. 이곳에 백남기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다(사진).

“(송기원은) 자가에서 피고인 이석표, 공소 외 중앙대 복학생 백남기, 안정배, 경영준과 회합, 민주화투쟁을 위한 학원 내 자율화운동은 재학생에게 맡기고, 복학생은 정치현실에 관심을 갖고 정치이슈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불법 데모방법을 합의하고….”

[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공소장 속 백남기씨

그달 8월20일자 7면에는 선고 사실이 보도됐다.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명단엔 ‘白南基(32·중앙대 4년)=징 3년’이라고 돼 있다.

농민 백남기. 천주교 세례명 임마누엘. 그는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박정희-전두환-박근혜 정권은 그의 꿈과 영혼을 누르고 가뒀다.

백남기씨는 1947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태어났다.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3선 개헌, 유신 등 장기집권을 꾀하던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했다. 군을 대학 내 상주시킨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에 반발해 시위하다 제적됐다. 1975년 유신정권에 맞서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2차 제적을 당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1980년 3월 다시 복교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끝내 오지 않았고, 백씨는 다시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그해 7월 중앙대는 또 그를 퇴학처분했다. 전두환 정권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그를 체포해 옥에 가뒀다.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부었다. 성기를 불로 지졌다. 고문 후유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3년 징역형.

백씨는 1981년 3·1절 특사로 가석방돼 귀향했다. 1983년 2월23일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이 됐다. 대학 선배 서청원·이재오 등이 정치권에 뛰어들어 한때 보수정권 최고위직에 근접했던 것과 달리 백씨는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했고,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아들과 딸 둘 이름을 ‘백두산’ ‘백도라지’ ‘백민주화’라고 지었다.

농민의 삶은 팍팍했다. 쌀값은 계속 떨어졌다. 2015년 11월14일 농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쌀 수매가 현실화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민중총궐기대회를 열었다. 백씨도 아침밥을 챙겨먹고 상경했다. 시위 중 경찰이 직사한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경향신문 2015년 11월16일 1면). 의식불명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갇혀 있다.

지난 12일 국회에서 백남기씨 사건 청문회가 열렸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물대포를 쏘거나 쏘도록 한 경찰들은 청문회에 설치된 가림막 뒤에 앉아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증언을 했다. 같은 시각 청와대에서 열린 회동에서 야당 대표들은 이 문제 해결을 촉구했으나, 박근혜 대통령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농민 백남기가 차가운 아스팔트에 누운 지 305일이 지났다. 이렇게 추석이 지나간다. 아무런 진상도 규명되지 않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처벌받지도 않았다. 이게 이 정부가 자국민을 대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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