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도구로 만드는 ‘문화 콘텐츠 디스토피아’ 레진코믹스

2018.01.05 17:18 입력 2018.01.05 17:38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블랙리스트 관리·여론 통제·소통 부재…

불통과 밀실 행정, 여론 통제, 블랙리스트 관리. 지난 박근혜 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9월부터 공론화되기 시작한 ‘지각비’ 징수와 해외 정산 미지급 문제로 비판을 받고 급기야 청와대 청원을 통한 세무조사 요청으로까지 이어졌던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이하 레진) 사태는 최근 들어 작가 블랙리스트 관리에 대한 의혹까지 터져 나오며 추한 바닥을 보이고 있다.

웹툰 작가들의 처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은송 작가의 트위터와 레진코믹스에 연재되다 중단된 <월한강천록>. 이미지 크게 보기

웹툰 작가들의 처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은송 작가의 트위터와 레진코믹스에 연재되다 중단된 <월한강천록>.

레진에서 <양극의 소년>을 연재하던 은송 작가는 과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작가 복지에 대한 불만을 밝힌 뒤 프로모션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일요시사’는 취재를 통해 은송 작가와 역시 SNS를 통해 유료 결제된 세이브 원고(공개 전 작가에게 미리 받아두는 원고)의 고료 미지급 문제를 공개했던 <봄의 정원으로 오라> 미치 작가가 레진의 모든 이벤트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됐다는 정황을 밝혀냈다.

당사자인 은송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 내부에서는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왔다. 담당 PD에게 사측 일처리의 미흡함, 지각비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해 문의하고 난 뒤엔 인기 작품이었음에도 갑작스럽게 모든 프로모션에서 누락되었다, PD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고, 나 또한 그 모든 사항에 해당됐다.” 작품에 대한 프로모션 및 메인 배너 노출은 신규 독자 유입에 결정적인 요소다. 그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해당 작가에 대한 부당한 페널티이며, 이차적으론 작가를 길들이는 도구도 될 수 있다. 초기 레진이 웹툰 유료화 모델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것을 강조했다면, 2015년부터는 작가를 위한 생태계 확립과 복지를 대외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특히 작가에게 최소한도로 보장되는 미니멈 개런티(이하 MG)를 월 2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을 당시 한 일간지에선 ‘레진코믹스의 개념 선언’이란 제하의 기사가 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레진 소속 작가 중 일부는 MG는 오르되 결제된 유료 코인당 작가 수익이 70원에서 50원으로 깎이는 것과 새 계약서의 독소조항들을 문제 삼았다. 당시 해당 이슈를 취재하며 입수했던 소속 작가들에게 보낸 레진의 전체 메일에선 현 사태의 단초가 보인다.

“SNS로 공론화해서 그나마 작가님들의 권익이 보호되었다고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그 일은 철없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이 불쾌하다고 하시는 작가님들이 훨씬 더 많고, 서로의 감정만을 자극해서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 대중의 심리를 모르는 일부 분들의 행동으로 회사 구성원들의 반감만 키울 뿐 아니라 레진에서 성실히 연재하시는 다수의 작가님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갈라치기다. 문제를 공론화해서 말썽을 일으키는 소수와 묵묵히 할 일을 하면서 괜히 피해를 보는 다수라는 구도는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쪽을 내부의 적으로 만들어 고립시키기에 좋다. 블랙리스트의 또 다른 피해자인 미치 작가에 따르면 “독소조항 건 당시 참여했던 작가님들 중에 연재를 막 시작한 작가님도 계셨는데, 그분들은 연재를 하고 완결이 난 뒤까지 프로모션을 받지 못했다.”

재밌게도, 작가들에게 위의 메일을 보냈던 PD는 1년 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정책방송원 KTV에 ‘차세대 웹툰 플랫폼의 선두주자’로 출연해 “좋은 작품을 서비스하기 위해선 우선 콘텐츠 창작 환경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레진의 이러한 모습은 이중적이다. 하지만 그저 위선적이라기에는 이들에게 어떤 일관성과 자기 확신이 커 보인다.

가령 지각비의 경우 2015년 독소조항 사태 때도 문제시된 바 있다(그리고 그들 ‘철없는’ 작가들 덕에 그나마 조금 깎였다). 당시 작가들과 면담한 PD의 논리는 업데이트되지 않는 작품이 있는 경우 마감 잘하는 작가에게도 피해가 가며 지각비 징수 이후 마감 지연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이들 작가의 공론화 및 면담 요청 전까진 지각비 비율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된 설명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효율성만이 정책의 근거가 될 뿐이다.

코인 수익 배분도 마찬가지다. 전체 파이가 늘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들의 MG를 올리기 위해 MG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작가들의 몫을 조금 줄이고 그렇지 못한 작가들의 수익을 보전해주는 것이 아주 이해 못할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동의 과정이나 최소한의 설명회는 없었고 200만원이란 액수만이 대외적인 미담으로 오르내렸다. 레진의 사업적 고민에 작가의 자리가 아예 없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군말 없이 통보에 따르는 방식으로서만.

레진이 주장하는 작가 친화 정책이 기만적인 건 그래서다. 공식 입장에선 “우리 만화가들이 얼마나 쉽지 않은 상황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작품을 생산하는 주체로서의 작가에 대해선 경의를 보이지만, 작가가 개인의 의견과 욕망을 가질 수 있는 한 사람으로 등장할 땐 사업의 변수로 대한다.

지각비와 해외 정산 문제를 앞장서 공론화한 <월한강천록> 회색 작가는 얼마 전 회사가 자신에 대해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을 제보받아 공개했다. 2016년 페미니즘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구매했다가 비난을 받고 게임에서 하차해야 했던 성우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가 독자들에게 ‘메갈 작가’로 찍혔던 작가들에 대해 “작가 병크”라고 명시한 내부 회의 기록도 있다. 입맛에 맞을 때만 존중하는 건 이미 존중이 아니다.

지난해 말에 레진 소속 작가들과 간담회를 갖고 불공정 사례를 수집한 한국만화가협회가 “지각비, 정산 이슈, 블랙리스트 문제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계약서에 반영해야 할 사항”이라고 레진 측에 요구했듯, 블랙리스트 문제는 어떤 변명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명백한 불의다. 이 명백한 불의를 해결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그 밑에 깔린 인간에 대한 도구적 관점을 고치는 것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앞서 레진 사태의 몇 가지 사례를 박근혜 정권의 그것과 유비하기도 했지만, 콘텐츠 스타트업의 첨단이자 선두임을 강조했던 레진의 사업 방식 중 상당수에선 한국 사회의 적폐가 드러난다.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건강한 생태계의 현실을 보라. 수익 하한선을 맞추지 못한 작가에게 MG를 보장하긴 하지만 노동에 대한 당연한 대가를 지불한다기보다는 수익을 못 낸 이들에 대한 사측의 호의처럼 포장된다. 호의는 베풀되 의문은 허용되지 않으며 존중을 말하되 소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로 레진에 한정해 유료 웹툰 사업은 지속가능한 모델에 근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과 맞지 않는 작가를 교체하고 새로운 인력으로 대체하며 밀어 넣는 수익 모델에서 사업은 지속가능할지 몰라도, 한 개인에게 만화가라는 직업은 지속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설계하는 콘텐츠 사업의 미래에 사람의 자리는 마련되었을까. 지금까지의 사례들로만 유추하자면, 그 미래는 SF에 등장하는 통제의 디스토피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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