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의 열망과 맞바꾼 ‘청춘 15년’

2007.06.07 18:12

‘군사정권 타도’의 함성이 전국 곳곳에서 울려퍼지던 1987년 6월19일. 당시 29살이었던 야채 노점상 허정길씨(49)는 대전역 앞에 시민들과 함께 섰다. 수만명의 시민들과 전경이 대치하는 상황. 허씨는 시동이 걸린 채 버려진 시내버스에 대학생·시민들과 함께 올라탔다. 시위대중 버스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허씨밖에 없었다.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버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숨이 막히고 자욱한 연기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6월혁명 20년, 민주화 20년] 가슴의 열망과 맞바꾼  ‘청춘 15년’

핸들을 놓친 버스는 때마침 시위진압을 위해 이동 중인 전경 1명을 치어 숨지게 했다. 허씨는 살인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교도소에 들어갈 때 서른살이었던 허씨는 마흔이 넘은 1998년 8·15특사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민자당 후보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 시절엔 특사는커녕 전국에서 가장 혹독하다는 청송교도소로 이감됐다.

세상은 바뀌었고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노심초사 아들의 석방만을 기다리던 홀어머니는 결국 아들이 풀려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취임 특별사면 때 허씨의 어머니는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허씨가 풀려날 것으로 기대했다. 사면 전에 면회를 오셨던 허씨의 어머니는 “이번엔 나가게 될 것”이라며 새 정부 출범을 기뻐했지만 허씨는 사면 대상에서 또 빠졌다. 허씨의 어머니는 곡기를 끊고 앓아 누웠다가 눈을 감았다. 교도소측은 어머니의 부음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허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이틀 후에 우연히 신문을 보고 알았다.

마흔살에 세상에 나온 허씨에겐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인력사무소에서 소개받은 막노동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일당은 5만~6만원. 차비를 아끼려고 단칸방에서 대전역앞 인력중개소 사무실까지 3시간을 걸어다녔다.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화물트럭을 사고 이제 한숨 돌리려나 했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허씨는 다시 감옥에 가야했다. 2000년 5월 대전 시내에서 허씨가 몰던 엑셀 승용차가 앞서 가던 승합차를 들이받았다. 차가 크게 파손된 것도 아니고 사람도 많이 안 다친 것 같아 연락처를 주면서 보험처리하겠다고 했지만 피해자들은 연락처를 받은 적이 없다면서 허씨를 신고했다. 허씨는 뺑소니 혐의를 받고 집행정지됐던 잔여형기 4년도 마저 채우게 됐다. 그는 “합의금을 너무 많이 요구하기에 내가 모아둔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몸으로 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막막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6월혁명 20년, 민주화 20년] 가슴의 열망과 맞바꾼  ‘청춘 15년’

요즘 허씨의 하루 일과는 새벽 2시에 시작된다. 폐기물을 수송하는 화물트럭 운전이다. 트럭에 실어 놓은 폐기물을 여수 소각장에 내려 놓고, 다시 천안으로 합성수지 폐기물을 실으러 간다. 대전 집에 돌아오면 오후 5시가 넘는다.

허씨는 교도소에서 만난 비전향 장기수들이 부쩍 생각난다고 한다. 그때 만난 장기수들은 직접 농사 지은 상추나 신선초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사회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25t 화물 트럭을 몰고 지리산을 지나다보면 그분들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여기가 그분들이 빨치산 활동을 했던 곳이구나 하고….” 허씨는 북으로 간 분들은 다시 뵙기 어렵지 않겠느냐며 아쉬워했다.

어둡기만 했던 허씨의 삶에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지금의 부인 김정순씨(49)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우연히 구멍가게에 들어가 주인과 별 생각 없이 얘기를 나누다 혼자 있는 언니를 소개시켜 준다는 게 인연이 됐다.

허씨가 여느 화물트럭 운전사와 다른 점이 있다. 항상 부인 김씨를 트럭 뒷자리에 태우고 다닌다는 점이다. 부인 김씨는 남편이 졸음운전을 할까봐 걱정이 돼서 허씨가 말리는 데도 한사코 같이 다니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부부는 하루 24시간을 항상 같이 보내는 셈이다. 허씨는 “부부 사이가 너무 좋으니까 남들이 샘을 낼 정도”라며 “형편이 좀 풀리면 자식도 많이 나서 키우기로 했다”며 웃음을 지었다.

허씨는 대전 참여자치시민연대에 가입한 회원이다. 지금은 돈 벌기가 바빠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고 했다. 간혹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도와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허씨의 ‘6월 혁명’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는 “6월 혁명이 20년이 지났지만 고쳐야 할 게 너무 많다. 서민들은 세금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데 정치인들은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생활인으로 겪어본 그의 ‘민주주의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그는 “오죽하면 서민들이 군사정권에 대한 향수에 젖겠느냐. 이런 식으로 가다간 언제 한번 또 크게 터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어려운 생활이지만 허씨 부부는 작은 희망을 갖고 있다. 돈을 좀 모으면 강원도나 지리산쪽에 땅을 사서 유기농을 지으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지은 농사로 나랑 가족들이 먹고 살고 싶다”는 것이 허씨의 소박한 소망이다.

〈글 김기범·사진 정지윤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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