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기가 엊그제 같았는데 아들만 붙들고 있어서인지 세월 가는 것에 현실감 없이 금세 3주기가 돌아왔습니다. 멀리 직장이나 군대를 보낸 듯 언제라도 용균이가 돌아올 것만 같습니다.”
2018년 12월10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한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6일 이같이 말했다.
김씨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다. 그의 죽음은 청년의 열악한 삶, 비정규직의 고단한 삶, 안전하지 않은 직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경종을 울렸다. 특히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움직였다. 작업복과 작업모, 방진 마스크 차림의 김씨는 ‘문재인 대통령님,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책임자 혼내고! 정규직전환은 직접고용으로!’라고 인쇄된 팻말을 들고 있다. 팻말에는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는 자필 글씨가 적혀 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여전히 더디다. 김씨의 동료들은 아직도 비정규직이다. 산업재해를 줄이겠다며 김씨의 이름을 달아 만든 법률은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김씨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원·하청 기업들을 상대로 한 기소와 재판 절차도 더디게 진행되면서 형사처벌은 유예된 상태다. 이선호씨 등 청년노동자들의 죽음은 끊이지 않는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
김씨는 한국서부발전의 도급업체 한국발전기술에서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였다. 2018년 12월10일 혼자 석탄 운송 컨베이어 벨트 밑에서 떨어진 석탄을 치우다 벨트에 끼어 숨졌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김용균 특조위)’는 2019년 8월 사고 원인으로 위험이 외주화된 원·하청 구조를 지목했다. 공정을 무리하게 쪼개 여러 협력사에 외주를 준 결과 위급상황에 대비하기 불가능할 만큼 현장과의 소통이 단절됐고, 노동자들이 상시적으로 산재 위험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2018년 12월 국회에서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2016년 5월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하청업체 노동자 김모군이 사망한 후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기업들의 반발로 국회에 계류돼 있던 법안이었다. 개정된 산안법에는 하청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고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의 도급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새 법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여 있다. 도급 금지 범위를 도금이나 수은·납·카드뮴의 제련·주입·가공·가열작업 등 유해 화학물질 대상 작업으로 제한했다. 김용균법이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정작 발전소에서 일하는 김씨의 동료들은 보호받을 수 없는 법이다.
김씨의 죽음 이후 제정된 또 하나의 법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해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김미숙 이사장과 CJ ENM에서 일하다 숨진 고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 등이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인 끝에 통과된 법이다.
산업재해 유가족들의 피땀이 어린 법률이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은 시행 전부터 구멍이 많은 누더기 법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중대재해처벌법에는 중대한 인명피해를 일으킨 산재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 개인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5인 미만 사업장은 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은 2024년까지 적용이 유예됐다. 산재 사망사고의 80%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다. 이 법의 실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발전소 동료들은 아직도 비정규직
김용균 특조위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위험을 낮추고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협력사 노동자를 직접고용하고 정규직화할 것을 석탄화력발전소에 권고했다. 2019년 2월 정부·여당은 후속 대책으로 “연료·환경설비 운전 분야는 공공기관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조속히 매듭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정규직으로 전환된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는 한 명도 없다. 신대원 발전비정규노조대표자회의 한국발전기술지부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열린 ‘고 김용균 3주기 추모위원회’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연다고 해놓고 발전소운전정비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률 0%를 달성했다”며 “김용균 동료들의 고용, 처우, 안전이 변화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3년이 지나도 1심 중인 재판
책임자 처벌은 법률 제·개정보다 더 더디다. 김씨 죽음의 책임을 묻는 재판은 아직 1심도 끝나지 않았다. 검찰은 김씨가 사망한 지 20개월 만인 지난해 8월에야 원청 대표이사 등 임직원 9명과 하청업체 대표이사 등 임직원 5명을 업무상과실치사와 산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대전지법 서산지원에서 진행 중인 1심 재판의 선고는 내년 1월에나 내려질 예정이다.
원청 측은 재판에서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미숙 이사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측은 ‘현장 컨베이어 벨트가 공항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안전한데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거나 ‘현장에 폐쇄회로(CC)TV도, 사고를 목격한 증인도 없어 왜 사고가 났는지 우리도 궁금하다’는 해괴한 변명을 내놓고 있다”며 “다른 산재사건 재판도 용균이 재판과 다를 게 없다. ‘회사 책임은 없다, 합의하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있지만 무죄다’ 같은 말에 할 말을 잃어버릴 지경”이라고 말했다.
손익찬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본부 법률팀장은 “사고 원인을 좁게 본다면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한 사람이 사망한 것이지만, 왜 그렇게 위험한 작업을 혼자서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아무런 대비책 없이 해야만 했는지를 반드시 따져물어야 한다”며 “사고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공간과 시간, 비용과 인력을 통제하는 의사결정권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법과 제도를 제대로 개선하지 않으면, 엄격하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된다. 지난 4월 경기 평택항에서 20대 노동자 이선호씨가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이 또한 인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