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

2022.07.29 03:00 입력 2022.07.29 03:04 수정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분필

잃어버린 세계를 딸칵, 열어주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의 입구에 자리한 단어들이 주로 그렇다. 올해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구사하는 어휘부터 맛이 있다. 시인이 되고자 고등학교 때 자퇴할 정도였다 하니 그가 만지는 말들이 참으로 은근하다. “수학자는 분필과 칠판을 사랑하는 최후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는 기호를 다루는 수학자인 동시에 말을 부리는 넉넉한 시인이다. 2010년 필즈상을 받은 프랑스의 세드리크 빌라니의 책,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라 낯이 좀 간지럽지만, <수학은 과학의 시다>도 궤를 같이하는 것이겠다.

지난주 EBS <금요극장>은 시골 학교를 무대로 한 <책상 서랍 속의 동화>였다. 수학 공식이든 시든 영화든 짧고 간결할수록 우리를 곧장 아름다움에 휩싸이게 한다. 배배 꼬지 않은 채, 찬물 한 컵의 깊이로 인생의 한 곡진한 풍경을 압축한 감독의 연출력이 신선했다. 영화에는 분필이 아주 인상적인 소재로 등장한다. 그 궁벽한 깡촌에서는 분필도 아껴야 할 공공재이다. 작게 쓰면 아이들의 눈을 나쁘게 하고, 크게 쓰면 분필이 많이 닳는다. 그러니 판서할 때 ‘당나귀똥’만하게 써야 한다.

주말에 초등학교 동창회가 시골에서 열렸다. 폐교된 지 오래인 학교를 지나는데 딸칵, 잊었던 단어들이 툭툭 굴러 나왔다. 필통, 책보, 걸상, 분필, 칠판, 풍금. 개망초 우두커니 서 있는 운동장 너머 저 적막한 교실에서 우리는 한때 매미소리에 질세라 목청껏 구구단을 외우고 국어책을 합창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돈 벌겠다고 도시로 떠난 친구를 찾아가는 데 필요한 차비를 계산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 벽돌공장의 일당을 따지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산수도 깨친다. 곡절 끝에 친구가 돌아온 날, 훌쩍 큰 아이들이 교실에 모두 모여 저마다 한 글자씩을 색분필로 쓴다. 天, 土, 勤, 名… 水, 學. 칠판의 ‘칠’은 천자문의 첫 대목인 천지현황 우주홍황의 ‘현’과 통하는 글자이다. 또각또각 분필소리를 타고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걸어나온 글자들이 광활한 칠판을 배경으로 어깨동무하듯 별자리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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