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부문 당선작 - 안전거리없음: 원시적 성실성과 武將SIREN의 진화 - 김훈론

2015.01.01 21:26 입력 2015.01.05 15:00 수정
이지은

1. 끼니의 이율배반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나에겐 맛있다고 생각되는 음식이 없습지요.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까짓거 사람들의 인기 같은 것을 얻으려 할 것 없이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실컷 배불리 먹고 살아왔을 겁니다. -카프카, ‘단식광대’

김훈은 끈질기게 끼니에 대해 말한다. 이순신은 전투에 앞서 적의 군량으로 그의 군사를 먹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먹일 필요가 없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먹으면 이긴 것이고, 먹을 수 없으면 끝난 것이다. 적병으로 포위된 남한산성의 남은 시간은 군량으로 계산된다. “하루 네 홉씩 삼십일”, 말미를 결정하는 것은 끼니다. 말미를 넘으면 항복도 싸움도 의미가 없다. 끼니는 김훈의 등단작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이하 빗살무늬)에서부터 일관되는 주제다. 불 냄새를 묻히고 집으로 돌아온 아침, 소방대장 ‘나’를 기다리는 밥 냄새로 이 소설은 요약된다. 신석기 사내의 돌칼을 보고 자신의 소방 장비를 떠올리는 ‘나’는 신석기 이래 시간에 줄줄 꿰어진 남자의 운명을 예감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한 벗을 수 없는 끼니의 속박이다.

끼니 앞에서는 많은 것들이 우스워진다. 그래서 끼니를 건 흥정은 선악미추의 개념적 판단 이전의 것이다. 김훈은 ‘먹고 싸는’ 원초적 감각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생물학적 인간으로 몰아넣는다. <현의 노래>에서 왕의 몸종 아라는 오줌을 누다가 생의 충동을 느끼고, <남한산성>의 새 봄은 밭에 뿌려지는 ‘똥물’로부터 시작된다. ‘먹는 일’을 그릴 때는 더욱 노골적이어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으로 놓인다. 말먹이로 말(馬)을 삶고, 그것으로 허기를 면한 군병들이 또 다시 말먹이 풀을 찾아 나서는 장면은 자연계의 먹이 순환 속에 포함되어버린 인간을 보여준다. 김훈에게 끼니란 생물학적 인간을 지탱하는 물질적 토대이며, 삶이란 이 토대 위에서 육체적 감각으로 구성된 “생리적 과정”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맛있는 것이 없어서 먹을 수 없다고. 인간이기에 오직 생존을 위해 먹지는 않겠다는 선언이다. 김훈 소설을 둘러싼 많은 불화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김훈은 끊임없이 전쟁에 대해서 썼는데, 그에게 삶은 약육강식의 쟁탈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날 것 그대로의 생명으로 취급하는 전쟁은 인간사(人間事)를 자연사(自然事)로 치환한다. 인간의 세계가 자연사로 흡수될 때, 세계와의 타협과 흥정은 본디 그런 것이라는 체념과 허무로 정당화되거나 혹은, 애써 부정한 거대 이데올로기를 약육강식의 진리로 대체하는 결과를 남기게 된다. 김훈의 이순신은 왜 죽여야 하는지 사유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오직 생존만이 목적이 되었을 때, 영웅은 도구적 성찰성과 직무적 수월성만으로 무장한다. 김훈에게 가해진 비판들은 대부분 그가 사회 속의 인간을 자연인으로, 젠더를 원형적 인간의 성으로 옮겨 버린 것에서 비롯된다. 결국 김훈에게 따라붙는 악명들-파시스트, 허무주의자, 개인주의자, 남근주의자 등-은 동일한 진원지에서 발신되어 서로 다른 경유 지점을 거쳐 도달한 것이다. 김훈에게 끼니는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허기가 절대적이지 않다면 단식의 위대함도 없다. 육체의 한계가 자명하기에 단식은 실존을 건 저항이 된다. 김훈의 입각점이 절대적인 허기 위에 있다면, 이것을 승인한 후에야 독해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김훈 읽기는 왜 죽여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이순신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왜 이데올로기의 진공 속에 하나의 몸뚱이로 이순신을 그려야 했는지 묻는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한 성급한 답안은 아마도 생존의 절박을 안겨주는 신자유주의 경쟁 시스템에서 얻어질 것도 같다. 그러나 동물로 내려앉은 인간의 조건을 자본주의로만 돌리는 것은 진실로 절망적이다. 자본주의 물질세계에서 동물로 격하되는 인간은 ‘물질’이라는 일차원적 매개 고리로 묶이면서 현실의 반대편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차라리 김훈의 ‘자연’이 ‘정치’의 안티테제로 세워져 있음을 주목하자. 이순신의 자연사(自然死)에 대한 집착은 정치사(政治死)에 대한 거부와 무게가 같다. 김훈에게 정치는 질문 구조만 바꿔도 헛것이 실체로 변하는 것이다. 헛것과 실체 사이를 왕복하면서 모든 것을 헛것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다. 그러니 이순신을 “탈정치적 순교자”로 명명하는 것은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이 된다. 이순신의 자연사는 탈정치가 아니라 안티-정치다. 헛것의 언어 속에서 유일하게 ‘참’이라 믿어지는 것이 바로 육체의 고통이다. 김훈의 언어가 도약하려는 육체성은 ‘참’의 진리값을 가지며, 따라서 그의 문장에는 이미 윤리적 태도가 스미어 있다.

김훈의 소설은 ‘매’와 ‘밥’으로 요약된다. 매에는 안전거리가 없고, 허기에는 예외가 없다.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며, 천주를 향한 기도는 두 문장이면 족하다: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생물학적 조건 앞에 모두를 평등하게 던져 넣는 원시적 윤리다. 그러나 “매는 곤장이 몸을 때려야만 무엇인지를 겨우 알 수 있는데, 그 앎은 말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김훈의 소설쓰기는 물질성에 도달하는 불가능의 언어를 위한 전쟁이다. “시원의 … 새로운 말”에 대한 기갈은 김훈 소설을 처음부터 관통하는 근력이다.

허기와 단식을 양 모서리로 하는 인간 존재론의 부채꼴이 있다면, 김훈은 철저하게 “먹이의 변방”에 서 있다. 김훈은 끝내 부채꼴의 반대편으로 걸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고통을 전제로 한 동행을 사유하면서 부채꼴의 사북자리로 걸어갈 것이다. 육체의 고통을 전제하지 않은 윤리는 초-현실적이다. 고통과 언어 사이의 거리는 고통을 ‘헛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말을 잃은 이유다. 이 망연함에 마주하여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김훈이다. 김훈의 전쟁을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일러스트 | 김상민

일러스트 | 김상민

2. 육하(六何)의 참패, 삶의 반격

<빗살무늬>(1995)의 신입대원 장철민은 소방서에 들어온 지 두 해 만에 죽는다. 그는 화재 현장에서 종종 명령을 위반했는데, 그것은 화재 진원지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장철민은 죽던 날도 소방대장의 명령을 어기며 화재 진원지로 진입했고, 콘트리트에 깔려 죽기까지 모든 증거를 깡그리 부수고 있었다.

“소방관이 증거점 부근을 이토록 부술 수가 있는 거요? 장철민이 그때 오층으로 들어간 이유가 뭐요? 진화를 위해 꼭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었소?”(<빗살무늬>, 44쪽)

장철민이 화재의 진원지를 모조리 부수어버렸기 때문에 수사관들과 배상관계에 놓인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증거’가 없기에 시비(是非)와 이해(利害)를 가릴 수 없었다. 소방대장 ‘나’ 역시 말을 잃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철민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각 다급하게 번져가는 불을 두고 장철민이 그 곳에 진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순직경위서’에 “복종심”, “책임감” 따위의 말들을 기입한다. 장철민의 순직보상금을 받아야 할 노모가 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의 거리, 이 소설이 묻고 있는 것이다.

본래 장철민은 불도저를 몰던 중기운전자였다. 노동은 계측되어 일당전표로 바뀌고, 일당전표는 열다섯 장이 모여 현금으로 바뀌었다. 소설의 끝에서 ‘나’는 장철민의 죽음이 “노동에서 노임으로까지 건너갈 수가 없었던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철민이 불도저를 몰 때 그의 몸은 기계와 하나가 되었는데, 그 육신의 흔적은 ‘삼만 이천 원’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맹인 안마사 김복희 역시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에 있다. 그녀는 화재의 혼란을 틈타 먼저 탈출한 손님의 돈을 훔쳤다. 뒤늦은 도난 신고로 소방대장 ‘나’는 마지못해 김복희를 만난다. ‘나’는 김복희가 미심쩍지만 추궁하기를 그만둔다. 어차피 증거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임으로 말해지는 육체의 노동, ‘순직’으로 처리된 장철민의 죽음, 화재 진원지의 멸실로 밝혀지지 않는 배상관계, 증거 부족으로 성립되지 않는 도난사건. ‘빗살무늬’를 엮고 있는 모든 에피소드들은 결국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들이 언어에 포획될 때 어떻게 변질되고 왜곡되는지를 보여준다. “삼만 이천 원”(기표)은 노동의 육체적 감각(기의)을 표현하기에 너무 멀다. 혹은 실제 벌어진 사건(기의)도 증거(기표)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언어는 벌어진 기표와 기의 사이를 횡단하며 기의를 왜곡하고 기표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해 작가는 온정적이지 않다. 여기 또 하나의 시체가 있다는 투로, 김훈은 장철민의 깨어진 두개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장철민의 사체조각들을 들어 관 속에 담았다. 머리와 가슴과 팔다리를 생시의 위치대로 관 속에 넣고 찌그러진 안전모에 엉겨붙은 뇌수를 고무장갑 낀 손으로 훑어서 관 속으로 탁탁 밀어넣었다. 나는 고무장갑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끈거리는 뇌수의 찌꺼기를 훑어서 관 속으로 털어넣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의 접촉부분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고무장갑을 벗어 장갑째로 관 속으로 던져넣고 관뚜껑을 닫았다.”(<빗살무늬>, 42쪽)

잔인하게 으깨진 장철민의 시체를 수습하면서 ‘나’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역하고 처참한 꼴을 피하지도 않는다. 여기에 사용된 모든 어휘들은 시체 수습 절차의 건조한 정보만을 전달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유일한 잉여의 어휘는 “탁탁”이라는 의성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전달하고 있는 핵심은 이 한 단어에 집중되어 있다. 탁탁, 물질과 물질이 부딪히는 소리다. 이 소리에는 죽은 장철민의 육신이 단지 사물이 되어 ‘나’의 살아 있는 육신과 부딪힐 뿐이라는 냉소가 스며있다. 김훈은 이 냉정한 직접성이야말로 우리를 지탱하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세계임을 말한다.

장철민과 김복희가 죽은 후, ‘나’는 본서로 진급한다. ‘말해지는 것’에 대해 의심하거나(장철민), 기만한 자(김복희)들은 모두 죽었다. 오직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의 괴리를 본능적으로 직감한 ‘나’만이 살아남았다. ‘나’는 장철민의 노모를 위해 “책임감”과 “복종심” 따위의 단어를 고를 줄 알았고, 증거가 없는 도난 사건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을 줄도 알았다. 한편,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김훈이 가까스로 던진 말은 “탁탁”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육체에 도달한 오직 한 단어다.

<공무도하>(2009)는 정확히 <빗살무늬>를 마주보고 있다. 여기엔 <빗살무늬>의 인물들이 조금씩 변주되어 등장한다. 기르던 개에 물려 죽은 버려진 아이, 화재 현장에서 금품을 훔친 소방관이 그렇다. <빗살무늬>에서는 장철민의 시체 위에서 건져 올린 “탁탁” 두 음절만이 겨우 고통의 물질성에 닿았다. 언어와 삶 사이에서 김훈이 제시한 선택지는 죽어서 완전한 몸뚱이로 환원되거나(장철민, 김복희), ‘말해지는 것’에 길들여지는(‘나’) 양 극단이었고, 동시에 하나의 허무였다. 그러나 <공무도하>는 삶과 언어의 전투 지형이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삶을 추적하는 주인공을 신문기자로 설정함으로써 삶이 육하의 언어로 말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빗살무늬>와 마찬가지로, 현장도 남아 있지 않은 백화점 화재 사건에 도난 신고가 뒤늦게 접수된다. 신문기자 문정수는 도난 사건의 범인이 소방관 박옥출임을 단번에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육하의 언어에 담기는 순간 박옥출의 삶이 증발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육하의 항목에는 평생 화염과 싸운 소방관의 신장염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박옥출의 삶은 ‘화재 현장에서 금품을 훔친 소방관’과 같은 한 줄의 제목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옥출의 힘없는 오줌줄기가 오히려 그의 삶의 진실에 가깝다. 이 개별적인 삶을 추상(抽象)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문정수는 아무것도 쓰지 않기로 한다.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六何)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바닥을 문정수는 때때로 노목희에게 말해주었다. (중략)

-그게 기삿거리가 되는지 안 되는지 난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냅둬. 쓰지 마. 난 그 소방관 편은 아니지만 문성수의 편이야. 쓰지 마. 그냥 냅둬. 경찰한테도 말하지 말고 데스크한테도 말하지 마. 냅둬.”(<공무도하>, 128쪽)

김훈이 즐겨 쓰는 표현같이, 삶은 선악미추가 “비벼져” 있는 것, 죽음과 삶이 “계통 없이” 뭉텅이져 있는 것이다. <공무도하>의 배경인 바닷마을 해망(海望)은 세상에서 튕겨난 이들이 밀려들어온 곳이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해망으로 도망 온 인물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해망은 김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포구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삶의 사슬이 엉켜 있는 곳, 서로가 먹이 사슬의 일부가 되어 지탱되는 곳. 육하의 항목으로 떼내어 가지런히 정리할 수 없는 삶이 모여 있는 곳.

오래 걸려서 삶은 육하의 언어에 반격했고 육하의 언어는 침묵했다. 이 사이에는 “순결한 시원의 … 새로운 말과 삶”을 전리품으로 얻고자 한 소설가의 전쟁이 있었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삶에 닿을 수 있는 언어를 김훈은 ‘시원의 말’이라 부른다. 그것은 <공무도하>에 비워진 ‘가(歌)’다. <공무도하>에서 노래는 삶에 기입되었고, 삶은 육하의 언어에 반격했다. 육하를 참패로 이끈 김훈의 노래를 추적해 본다.

3. 武將SIREN의 노래

“자! 이리 오세요, 칭찬이 자자한 오뒷세우스여, 아카이오이족의 위대한 영광이여! … 우리 입에서 나오는 감미롭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기 전에 검은 배를 타고 이 옆을 지나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어요. … 신들의 뜻에 따라 겪었던 모든 고통을 다 알고 있으며 풍요한 대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다 알고 있으니까요.”(호머, <오뒷세이아>, 문예출판사, 272쪽)

노래의 신 뮤즈는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뮤즈는 시적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사건의 기억을 일깨워주므로 고대인들은 서사시의 앞머리에서 늘 뮤즈에게 도움을 청했다. 뮤즈의 네거티브 버전이 사이렌이다. 사이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뒷세우스를 이렇게 유혹한다. 나는 알고 있노라, 너의 고통의 기억과 네가 잃어버린 대지의 기억 모두를. 고대인들에게 노래란 망각과 기억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통의 순간을 망각 속에 떨어트리고,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내는 것이 노래이다. 사이렌의 유혹이 치명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는 사이렌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스트에 몸을 묶는다. 그러나 귀를 막지는 않는다.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엔 지적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꾀 많은 오뒷세우스의 불성실함과 비겁함. 어떤 위험도 없이 그리고 결과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사이렌을 바라보며 즐기는 그 불성실함. 행복하고 안전한, 요컨대 어떤 특권적 지위에 뿌리를 둔 비겁함. 오뒷세우스는 특권적 지위에 의해 공통의 조건으로부터 제외되고 있다. 그는 밀랍으로 귀를 막은 뱃사공들로부터 안전을 취하면서 자신만이 홀로 사이렌의 황홀한 노랫소리를 들었다. 사이렌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그 세계로 이끌려 가지 않는 오뒷세우스의 태도는 사이렌에게 절망을 주고, 노래를 ‘이야기’라는 공간 속에 박제해 버렸다. “에피소디온(Epeisodion)이 된 오드(Ode)의 항해.”(모리스 블랑쇼, 심세광 옮김, <도래할 책>, 그린비, 2011, 15-16쪽)

소설의 기원이 노래의 이야기 됨이라면, 김훈의 소설은 노래로의 귀환이겠다. <칼의 노래>(2001)와 <현의 노래>(2004)는 잃어버린 대지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김훈의 노래에서 세계가 나타나는 형상을 보라.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객체들이 이들 소설에서는 주어의 자리로 옮겨져 있다. 산은 제 스스로 몸을 세우고, 하늘은 산을 받는다. 염전에서는 소금이 오고, 땅에서는 무덤이 돋아난다. 산과 하늘과 무덤이 주어의 자리로 옮겨갈 때, 존재의 사태는 모두 자동사로 꾸려진다. 자동사의 언어로 지어진 세계, 그것은 세상 만물이 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이다.

“산맥이 갈라지는 틈새마다 나라들은 서식했고 강과 강 사이마다 나라들은 돋아났다. 빈약한 물 한 줄기가 겨우 흘러내려오는 산골짜기 사이로 경작지는 비집고 들었다. 나라들은 잘록하거나 오목했는데 오래된 부스럼처럼 완강하게 땅에 들러붙어 있었다. 날랜 말로는 한나절, 걸어서는 이틀을 가면 나라는 바뀌었다. 개들이 마주 보며 짖었으며 맞닿은 나라의 낮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길러서 먹기는 힘들었고 빼앗기는 더욱 어려워서 전쟁과 생업은 구별되지 않았고 군사와 백성이 따로 없었다.” (<현의 노래>, 16-17쪽)

자동사의 언어는 세계를 스스로 드러나게 하고, 이 세계 속에서 오뒷세우스는 무장해제 된다. 임금은 멀리서 울음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만 이순신의 칼은 그의 몸속에서 운다. 이순신은 명량 앞바다에서 생사존망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을 역류를, 밤마다 다가오는 적의 기척을 온몸으로 느꼈다. 우륵의 소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손가락이 현을 튕기고, 사마귀가 앞다리를 들고, 소리가 솟고, 쥐들이 흩어지고, 악사의 어깨가 쥐의 동작과 함께 흔들리는 것이 소리다. 솟고, 튀고, 흔들리는 현의 노래는 그 자체로 몸이다. 방관은 불가하다. 생의 감각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 이것이 김훈의 성실성이다.

자동사의 언어는 물질의 세계에 육박해간 김훈 고유의 언어다. 김훈의 ‘역사’소설들이 자동사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면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는 기호로 전락한 언어의 양상이 나타난다. ‘항로표지’(2005)의 등대장 김철은 국어 선생님이 되어 육지에 정착하려 한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그는 “‘소’라는 소리가 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소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의 실체”(‘항로표지’, <강산무진>, 119쪽)가 무엇인지 의아해 한다. 그에게 육지는 “이름을 부르면 뒤돌아보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아이들이 살아서 뛰어놀고 있”는 곳이다. 소설가는 김철의 육지 생활을 그리지는 않았다. 과연 육지의 언어는 12초에 한 번씩 명멸하는 백색섬광의 등대 신호(Sign)와 달랐을까. 아마 김철은 국어 선생님이 되어서도 등대장으로 살았을 것이다. 이미 인간의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분리된 채 기호(Sign)로 전락했으니까.

‘화장’(2003)에는 이름과 부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가지 못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고대적 이름을 가진 추은주, 흰 목과 빗장뼈와 푸른 정맥을 가진 그녀는 확실하고 가득 찬 몸으로 ‘나’ 앞에 완연히 살아 있다. 추은주를 향한 ‘나’의 계속된 부름은 육체에 도달하려는 언어의 불가능한 도정을 보여준다. ‘나’의 부름은 추은주의 몸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져, 부름이란 차라리 허기나 기갈이 된다.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삼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화장’, <강산무진>, 54쪽.)

김훈은 삶이란 오줌 마렵듯 명확한 것이라 했다. 따라서 소설가로 자처하는 그의 운명은 명확한 요의(尿意)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름과 부름 사이의 심연 속에서 괴로워하는 ‘나’가 전립샘염을 앓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몸으로 감각하지만 음성으로 옮길 수 없는 웅얼거림은 마려운 오줌을 누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같다. 고무장갑 낀 간호사의 손 안에서 부푸는 성기의 참담함, 도뇨관을 통해 흘러나오는 힘없는 오줌은 불가능한 언어를 꿈꾸는 소설가의 고통이다.

김훈은 세계를 그림으로써 이 명확한 감각에 닿으려 한다. 삼라만상이 발하는 존재의 빛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 푸른 대기 위에 사물이 스스로 “배어나오 듯” 그렇게 세계를 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다” 안에는 어떠한 추상성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표와 기의가 납작하게 붙어 있는 상형문자처럼 김훈의 노래는 언어에 사물이 가득 찬 상태, 어떠한 관념의 공백도 남기지 않은 상태를 꿈꾼다. 타락한 언어의 세계에서 인간 언어가 세계에 육박하는 최대치는 그것을 감각하는 것이다. 비리고, 역하고, 짓이겨지는 고통의 감각 속에는 관념의 공백이 들어설 수 없다.

“-얘, 저 얼굴 좀 봐. 저 손바닥을 좀 봐. 어쩜 저렇게 배어나오듯이 그려놓을 수가 있니?”(‘언니의 폐경’, <강산무진>, 274쪽)

4. 말로 그린 그림

<내 젊은 날의 숲>(2010)에는 할아버지-아버지로 이어지는 밥벌이의 삶과 김중위로 대표되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의 이야기가 양쪽에서 묵직하게 흐르고 있다. 김훈 소설의 여느 가장처럼 아버지는 가족들의 생리적인 삶을 지탱하는 신석기 이래의 남자로, 선악미추를 가늠할 수 없는 운명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는 사람의 뼈가 돋아나고 있다. <내 젊은 날의 숲>에는 밥벌이와 죽음, 이제까지 김훈 소설의 두 가지 화두 모두가 있지만, 정작 이 소설은 여기에서 비켜서 있다. 주인공 ‘나’는 꽃과 유골을 그리는 화가다.

‘나’는 생명을 포착하기 위해 여러 날 꽃과 풀에 집중하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꽃은 저마다의 시간에, 저마다의 기온과 습도에서 최고조의 생명력을 뽐내고, 그 순간 꽃들에서는 “쟁쟁쟁”하는 울림이 들려온다. ‘나’는 유골에서도 “쟁쟁쟁”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생명과 죽음의 울림을 그림으로 옮기려 애쓴다. 꽃과 유골의 울림을 그려내려는 ‘나’의 부단한 노력과 시도는 김훈의 소설쓰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물에 도달하는 불가능한 언어를 구하는 것이 김훈의 소설쓰기가 아니었던가.

“뒤틀린 정강이뼈의 단면에 햇볕이 닿았다. 희미한 세포의 구멍과 얼개들이 빛 속에서 오글거렸다. 거기서, 쟁쟁쟁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아침에 그리려다가 못 그린 패랭이 꽃잎이 햇볕을 받으면 쟁쟁쟁, 환청을 울리듯이, 이 뼈를 그리려면 쟁쟁쟁 울리는 기운을 그려내야 할 것이었다.(<내 젊은 날의 숲>, 172쪽)

수목원의 안요한 실장은 세상 각각의 꽃들이 무슨 이유로 저마다의 색깔로 피어나는지, 그 꽃의 색깔이 생명의 안쪽 어디에 잠재되어 있는지에 골몰한다. 그러나 ‘나’는 “꽃은 왜 그런가”라는 질문이 혼란스럽다. “본래 그러한 것에 대하여 왜 그런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타당한지” 가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말을 해야만 살 수 있고 말로 해야만 안심이 되는” 안요한 실장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용문의 “꽃”을 ‘삶’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삶은 영원히 자신의 비밀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설가는 “말해야만 살 수 있고 말로 해야만 안심”이 되리라.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라는 김훈의 모습이다.

“그의 연구는 한마디로, 꽃은 왜 저런가?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그의 책 서문에서 ‘꽃은 영원히 자신의 비밀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나는 말을 해야만 살 수 있고 말로 해야만 안심이 되는 수목원 연구직 서기관 안요한 실장이 답답하고 가엾게 느껴졌다. 저 자신의 색깔로 이미 스스로 발현했는데 꽃이 그 발현의 배경에 대하여 입을 벌려서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내 젊은 날의 숲>, 83쪽)

‘명태와 고래’(2014)에는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3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이춘개(李春介)의 그림이 있다. 그는 본래 함경남도 포구마을에 살았는데 1950년 겨울, 밀려오는 피란민에 휩쓸려 남쪽 향일포로 내려왔다. 배를 타던 그는 어느 날 짙은 안개 때문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버리고, 북에서 체포된다. 이춘개는 군인들의 요구에 따라 향일포의 그림을 그려주고 그 대가로 풀려나지만, 6년 후 향일포에서 그의 그림을 들고 있는 남파 간첩이 붙잡힌다. 이춘개가 13년을 복역한 경위다. 이춘개는 남과 북을 옮겨 다녔지만, 그가 ‘군사분계선’을 넘은 적은 없다. 그에게는 한 번도 이데올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춘개의 삶의 터전이 바다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이데올로기의 언어로 납득될 수 없다. 남과 북 ‘사이’에 존재하는 이춘‘介’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명태라면 모를까.

-북쪽에서 밀려내려오니까 남쪽으로 …… 그냥 휩쓸려서 ……

-이 새끼야, 니가 명태야?”(‘명태와 고래’, 계간 ‘문학동네’ 2014년 봄호, 177쪽)

이춘개가 인민군의 요구대로 향일포를 그려주었을 때에도 그들은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요구했다.

“-바위는 좋았어. 이 점들은 뭐냐?

-고래요.

-고래는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그릴 필요 없잖냐. 야, 지워. 헷갈린다.(‘명태와 고래’, 178-179쪽)

지도에서 바위는 용인되지만 고래는 축출된다. 바위는 방향을 가늠하고 공간을 분할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그곳에 살아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다. 다만 침략과 팽창이라는 목적에 충실할 도구만이 필요할 뿐이다. 흡사 육하의 언어가 삶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소거해 버리는 것과 같이 지도는 그곳에 있었던 삶을 지워버리고, 삶의 공간을 조각낸다. 이춘개가 그린 고래와 바위 중에서 이데올로기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바위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000년 전 향일포에 살았던 원시인간은 고래를 그렸다. 그들은 고래와 함께 살았으며, 그러한 삶에 있어서 바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춘개의 삶을 모두 소거한 지도(육하의 언어)는 그에게 간첩죄,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를 씌운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해질 때 벌어지는 비극은 이미 장철민과 김복희에게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이춘개는 정말로 명태처럼 바다를 오가며 살았는지도 모르나, 바다는 이데올로기의 그물 속에 있었다. 이춘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바다와 마을”을 그렸지만 그것은 남파 간첩의 지도로 둔갑하고 말았다. 복역을 마치고 향일포로 돌아온 이춘개는 자살을 하고 만다. 그러나 이춘개의 죽음을 단순히 삶의 포기로 볼 수는 없다. 그가 남긴 그림 때문이다.

“그림 열 점의 제목은 모두가 ‘바다와 마을’이었다. 긴 가로그림 속에서, 봉우리들이 일어서고 잦는 산맥 아래로 포구의 시설물들이 일출의 빛을 받고 있었다. 흰 겨울 산맥이 뼈를 드러내며 이춘개의 화폭 위쪽으로 흘러갔다. 아침바다는 빛과 어둠이 섞여서 출렁거렸다. 빛 한 가닥이 향일천 물줄기를 거슬러서 상류로 올라가며 고래 그림 바위 쪽을 향했다. 화폭에 보이지 않지만, 바위 속의 고래들이 깨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이춘개의 화폭 가장자리에서, 작살을 쥔 사내가 고래 등 위에 올라서서 일출의 바다로 나아갔다. 작살은 사내의 키보다 크게, 길게 그려져 있었다. 고래떼의 항적이 빛의 궤적을 그리며 길게 이어졌고, 마을이 시간 위로 말갛게 떠오르고 있었다.”(‘명태와 고래’, 185쪽)

이춘개의 그림은 자동사의 언어로 지어진 세계다. 봉우리들이 일어서고, 산맥은 뼈를 드러낸다. 물줄기를 역행하는 빛은 시간을 거슬러 7000년 전 고래를 깨운다. 죽기 전 이춘개의 그림 그리기는 지도로 왜곡되었던 삶의 공간을 다시 복원하는 작업이다. 화폭의 가장 자리에는 고래 등 위에 올라탄 신석기인이 있다. 사내는 고래를 타고 바다를 누빌 것이다. 신석기의 바다에는 이데올로기의 그물이 없으므로, 여기에는 말해질 수 없는 삶만이 있을 뿐, 말해져야 할 것은 없다. 말해질 수 없는 삶에로의 귀환을 위해 이춘개는 그림을 그렸다.

‘명태와 고래’에서 그림 그리기는 삶을 표현하는 가장 본능적인 몸짓이다. 7000년 전 향일포의 원시인간은 고래 그림을 남겼고, 가난한 이춘개의 아들은 동급생 아이의 폭력을 견뎌가며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린다. 이들의 그림 그리기는 단순히 이데올로기 언어에 대한 항의나 계급적 저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그림을 방해하는 온갖 폭력들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부단히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란 삶 자체이며, 삶의 직접성에 가장 가까운 언어다. ‘명태와 고래’는 김훈의 그림이다.

5. ‘안전거리없음’ ↔ ‘저만치 혼자서’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책머리에’, <칼의 노래>, 6쪽)

장철민은 사지가 으스러지고 두개골이 깨어져 죽었다. 그의 분홍빛 뇌수는 안전모에 칠갑이 되었다. 김복희는 투신자살했다. 투신한 자리의 길바닥에 핏자국과 살점이 눌어붙었다.(<빗살무늬>) 명량에서 어부 오극신과 정명설은 고기잡이배에 아들을 태우고 나가 싸웠다. 적병은 아비를 찍고 아들들을 베었다. 어선이 뒤집힌 바다는 고요했다.(<칼의 노래>) 이사부는 야로 부자를 죽이라고 명했다. 부자의 몸은 맞잡고 흔들리다가 구덩이 쪽으로 던져졌다.(<현의 노래>) 마노리의 목은 굵었다. 망나니는 힘을 주어 수직으로 내리쳤다. 목은 두 번 칼질에 떨어져 나갔다.(<흑산>) 전쟁이 지난 자리에 뼈들이 돋아났다. 뼈는 피아를 구별할 수 없었고, 한몸에서 나온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풍화되어 나무젓가락만큼 가늘어져 있었다.(<내 젊은 날의 숲>)

김훈의 소설에서 죽음은 즉물적으로 던져져 있다. 죽음은 멜로가 아니고, 사념이 아니다. 죽음은 몸뚱이와 몸뚱이로 부딪쳐 “탁탁” 소리 나는 것이고, 구덩이 속으로 “철퍼덕” 떨어지는 것이다. 군율을 어긴 자를 벨 때 이순신은 고뇌하지 않았고, 품었던 여진의 몸도 죽어서는 무수한 시체와 동등하게 쌓였다. 잔혹함의 위악이다. 이 위악적 태도는 죽음의 물질성을 정조준하고 있다. 언어가 헛것으로 만들 수 없는 ‘참’으로서의 죽음. 이 참된 죽음을 지키기 위해서 무장(武將/武裝)이 필요하다. 죽음 앞에서, 멜로 없음. 고뇌 없음. 그리고 연민 없음.

고통에 대한 연민은 그 고통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지 않음을 전제한다. 고통의 상황에 대한 아주 소량의 도덕적 감정이 연민이다.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계간 ‘문학동네’ 2014 가을호, 416~417쪽 참조.) 김훈의 잔혹함은 여기에 대항한다. 육체가 감당하는 고통에는 예외가 없으며 방관이 불가하다. 김훈식의 윤리란 그런 것이다. 평등하고 성실하게 치르는 세계와의 전면전이다. 김훈은 자신의 책 첫머리에 자주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1. 이 책은 소설이다.” 감히 일러두기를 갱신한다: 0. “죽지 마라. 명령이다” 하나 더: 0. 안전거리없음.

武將SIREN은 “안전거리없음”의 언어를 구하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본래 대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국 대답할 수 없다”는 언어의 한계로부터 “저절로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일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다”까지, 김훈은 싸우며 진화했다. ‘대답할 수 없는 말’에서 ‘저절로 되지 않는 말’로 나아감에는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는 당위가 징검돌로 놓여 있다. 김훈은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갈 때문에 자동사로 세계를 빚었으며, 상형문자로 소설을 썼다. 오뒷세우스는 스스로 드러나는 세계에 이끌려 무장해제 되었으며, 그림에 닿아가는 언어는 관념의 공백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아 있다. 죽음의 물질성이 각자의 몸에서 참이 될 때 우리는 무엇으로 공동(共同)을 꿈꿀 수 있는가. 물음에 대한 답은 다시 죽음에서 시작된다.

“죽음을 보편적인 자연현상 속에 내던져버리지 않고 죽어가는 자들을 하나씩 개별적으로 씻기고 달래서 경계까지 동행한 마가레트 수녀의 그 한없이 낮은 뜻을 기리는 이름이었다.”(‘저만치 혼자서’, 계간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 126쪽)

여전히 김훈에게 몸의 유한성은 소통될 수 없고 공유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타인의 죽음은 끊임없이 나의 유한성과 개별성을 환기해 줄 뿐이다. 그래서 죽음에의 동행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모두가 고독한 유한성에 갇힌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준다. 이는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저만치 혼자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공동의 존재임이 확인되는 것이다. 죽음에의 동행은 유한성이라는 결핍을 조건으로 한 만남이다.(모리스 블랑쇼, 박준상 옮김,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문학과지성사, 2011, 21-23쪽 참조.) 고독의 확인이며, 동시에 그 고독의 공동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개체의 자연사에서 자연사를 둘러싼 고독으로 죽음의 의미가 확장되는 순간이다. 다시, 이것은 태도 변경은 아니다. 자연사의 진화다.

살아 있으라는 지상명령과 성실히 고통 받으라는 윤리. 김훈의 그 다음은 각자의 고통으로써 타자의 고통에 동행하는 것이다. 고통은 영원히 말해질 수 없고 소통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 받을 육체를 가졌다는 것만큼은 당신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통과 고통이 동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역설적이게도 이 고통이 말해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동행이 말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몸으로써만 가능한 이유다. 두 번째 전면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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