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투는 또 하나의 가능성, 매끄러운 번역에 집착하면 안돼"

2018.06.08 14:00

현대 서양문학 독자라면 정영목(58)이 번역한 책 몇 권쯤은 읽어봤을 터다. 얼마 전 타계한 미국 현대문학의 거목 필립 로스를 비롯해 조제 사라마구, 커트 보니거트, 코맥 매카시, 존 업다이크, 알랭 드 보통 등 동시대 빼어난 작가들의 소설이 정영목의 손을 거쳐 한국어라는 새 옷을 입었다. 하나같이 언어와 문화권의 경계를 넘을 때 까탈을 부릴 법한, 원어민이 읽어도 수월하지만은 않을 작품들이다.

정영목이 문학만 번역하는 건 아니다.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 마사 누스바움의 <인간성 수업> 등 비문학 서적들도 정영목의 번역작이다. 그렇게 정영목이 번역한 책은 지난 27년간 200권이 넘는다. 정영목과 함께 많은 책을 작업한 이현자 문학동네 편집자는 “번역가가 작품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면 전달조차 안되는 작품들이 많다”며 “맨부커상, 퓰리처상 수상작같이 어려운 작품을 낼 때는 일단 ‘정영목’이란 이름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역자’였던 그가 처음으로 ‘저자’가 됐다. 번역 이론에 대한 단상을 담은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와 그동안 번역한 주요 작가들에 대한 생각을 엮은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법>(모두 문학동네)을 함께 출간하면서다. 통번역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이화여대 교정에서 정영목을 최근 만났다.

번역가인 정영목 교수가 4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번역가인 정영목 교수가 4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수도 없이 번역했지만 정작 본인의 책은 처음입니다.

“많이들 축하해주시지만, ‘역자’에서 ‘저자’로 ‘영전’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자가 역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부정이 되겠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국내외 저자들이 있지만, 그건 그들이 ‘저자’라서가 아니라 ‘좋은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 영문학을 전공하셨지만, 번역의 길로 접어든 건 ‘어쩌다보니’였다고요.

“1980년대 대학에서 번역은 ‘먹물의 막장’에 가까웠습니다.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제게도 번역은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취직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번역과 과외였는데, 나이 들어서 남의 집 문 두드리고 들어가 과외하려니 영 힘들더군요.”

- 그럼 번역을 ‘직업’으로 삼은 계기는 기억하시나요.

“명확히 ‘이때부터 직업이었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뒤돌아보니 ‘번역가’로 자각이 생겼고, ‘이제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세대는 번역가를 자처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저희 세대에는 묘한 수줍음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좋아서 한 게 아닌데 남들이 그렇게 불러줄 때의 기분이랄까요.”

정영목은 번역을 하기 전에 책을 먼저 숙독한다고 한다. 그다음 초벌 번역을 한 뒤, 퇴고를 한다. 번역가에 따라 초벌 번역에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 있고, 퇴고에 시간을 더 들이는 이도 있다. 정영목은 “눈으로 읽는 것과 손으로 번역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표현했다. 정영목은 과거엔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영한사전을 주로 이용했지만, 요즘엔 워드프로세서에 딸린 사전이나 인터넷 사전을 이용한다. 출판사는 통상 ‘한 달에 100쪽’의 번역 속도를 요구한다. 장편 소설 1권을 번역하는 데 평균 3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정영목은 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번역한다. 노래가 있는 성악은 신경이 쓰여 듣지 않지만, 기악곡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처럼 격렬한 음악도 작업에 도움을 준다.

정영목의 에세이 2권(왼쪽)과 그가 번역한 책들 /문학동네 제공

정영목의 에세이 2권(왼쪽)과 그가 번역한 책들 /문학동네 제공

- 번역료는 요즘도 매절(판매부수에 관계 없이 일시불로 지급) 형태입니까.

“제 자부심 중 하나가 번역료를 부수에 따라 인세로 받는 관행을 조금씩 정착시켰다는 겁니다. 이건 돈 문제라기보다 권리 문제입니다. 책이 안 팔리면 오히려 인세가 매절보다 액수로는 불리할 수도 있어요. 인세 계약은 역자도 책을 함께 만드는 사람이고, 그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뜻이죠.”

- 대부분의 번역은 출판사가 의뢰한 뒤에야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번역가로서의 ‘수동성’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오래전에는 번역자가 먼저 읽고 출판사에 책을 내자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요즘엔 드뭅니다. 아무리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어도, 출판사로부터 의뢰를 받지 못하면 할 수가 없죠. 지금 번역자는 선택지를 만들기보다는,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선택합니다. 이건 배우나 연주자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배우는 주어진 배역 안에서 선택하고, 피아니스트는 기존의 곡들 중에서 연주하니까요. 그렇다고 배우나 피아니스트가 ‘수동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죠.”

- 출간 후 번역의 오류를 깨달으면 어떻게 합니까.

“모든 번역은 다시 살피면 더 좋아집니다. 더 좋게 만드는 과정에서 마감 때문에 중단할 뿐이죠. 재쇄를 찍으면 고칠 수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오류 없는 번역서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건 마감 있는 글의 숙명 같습니다.”

번역가인 정영목 교수가 4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번역가인 정영목 교수가 4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번역을 평가할 때 ‘가독성’을 따지는 경우가 많지만, 정영목은 원저의 까칠함을 갈아내선 안된다고 말한다. 흔히 ‘번역투’란 외국어를 직역한 듯 어색한 한국어 문장을 비판할 때 사용하는 수식어지만, 만일 ‘번역투’가 한국어의 가능성을 확장한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영목은 이렇게 썼다. “그런 압박(매끄러운 번역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면 번역가는 가장 안이한 선택, 즉 모든 번역에서 나 자신의 언어로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언어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번역은 제3의 언어, 한국어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한국어의 외연을 확대하는 과제를 수행하기는커녕 통속적인 한국어를 재생하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 당신은 ‘매끄러운 번역’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문의 표현을 번역했는데 한국어로 부자연스럽다고 해서 그걸 포기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 부자연스러움이 우리말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습니다. 언어가 넓어지면 인식도 넓어집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과 인간이 엮이고 함께하는 여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번역의 역할입니다.”

- 데버러 스미스의 한강 소설 번역에 관한 논란도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을까요.

“번역에 관한 논의가 ‘오역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만 집중된 것 같습니다. 흔히 한국문학과 해외문학을 나누지만, 전 ‘한국어로 번역된 외국문학은 정말 외국문학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외국문학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외국문학은 제 머릿속에서 이미 섞입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 문화와 주고받는 것들이 생기죠. 그렇다면 혹시 <채식주의자>의 영역본은 영어문학 속에 자리 잡는 것 아닐까요. 한국인들은 <채식주의자> 영역본을 한국문학의 하위범주로 생각하고 싶겠지만, 한국어로 기록된 한강, 영어로 기록된 한강은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오역 논의가 있더라도, 그건 해당 문화권에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 번역이 불가능할 것 같은 작가가 있었습니까. 번역했지만 여전히 까다로운 작가는요.

“2015년 맨부커상을 받은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읽어봤습니다. 웬만하면 이런 얘기 안 하는데 ‘이건 도저히 안되겠다’ 싶더군요. 언어유희와 다양한 언어들이 섞여 있어서 번역으로 살려내기가 어려워 보였습니다. 존 업다이크의 작품을 몇 권 번역했지만 아직까지 소화가 안된 듯 괴롭습니다. 업다이크는 필립 로스처럼 ‘산맥급’의 작가입니다. 산을 몇 개 넘어봐야 전체가 보인다는 뜻입니다.”

- 필립 로스, 존 업다이크, 존 밴빌 등과 비교하면 알랭 드 보통의 번역은 상대적으로 쉽지 않나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같은 보통의 초기작을 보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독특한 방식과 문양이 있습니다. 한 여자를 갈구하면서도 거리를 두려 하고, 또 냉소적이면서도 자의식이 강합니다. 그런 목소리를 포착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 원작자를 직접 만나거나,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하나요.

“과거에 <척하는 삶>을 번역할 때 이창래 작가에게 e메일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논리적인 허점이 있는 것 같아 설명을 부탁드렸습니다. 답신의 요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였습니다(웃음). 전 그게 일리있는 태도라고 봅니다. 해석은 번역자의 몫이라는 거죠. 이후로는 어느 원작자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번역가인 정영목 교수가 4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자신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번역가인 정영목 교수가 4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자신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지금 영어는 강하다. 한국에선 말할 것도 없고, 언어적 자존심이 높은 유럽에서도 영어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조차 공개석상에서 유창한 영어 담화를 한다. 영어는 세계어일까.

- 당신은 영문과 80학번입니다. 당시 대학에서 영어에 대한 생각은 지금과는 달랐겠죠.

“그때 영문과는 ‘제국주의 학과’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요새 영어는 위세가 엄청나게 세졌죠. 지금 영어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미국의 언어이자, 어느 선을 넘어가면 세계의 언어입니다. 미국이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고, 그건 쉽게 바뀌지 않겠죠. 이젠 ‘영어’가 아니라 ‘영어들’이라는 개념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특정 지역의 영어를 표준으로 삼을 게 아니라, 다양한 영어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거죠.”

- 통번역대학원은 인기가 많나요.

“많은 대학원이 정원 미달인데, 통번역대학원은 여전히 입학 경쟁률이 높습니다. 번역이 각광받은 건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기업이나 조직이 흔들려 각자도생하는 시기가 오자, 혼자서도 먹고살 수 있는 수단으로 번역을 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실용적인 동기로 입학한 많은 학생들이 대학원에서 인문학, 문학 수업을 받으면 그쪽으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전 그때 보람을 느낍니다. 아울러 대학에서 인문학, 교양 교육이 제대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 번역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 ‘말귀 알아듣는 능력’입니다. 이게 의외로 간단치 않아요. 말 자체가 완전하지 않고, 성기기 때문입니다.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또 그 바탕에는 타인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늘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말해서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번역을 잘 못해요. 어쩌면 번역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은? ‘엉덩이’입니다. ‘번역은 엉덩이로 한다’고 해요. 끈질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 인공지능 번역의 수준은 어떻습니까. 조금 더 발전하면 번역가가 필요없는 것 아닐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기계번역 수준이 올라간 건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기표만 따져 번역하면서부터입니다. 데이터와 통계에 기반해 번역하고, 사람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번역이 좋아졌어요. 지금 기계번역은 문장 단위로 이루어집니다. 이건 약점이기도 합니다. 각각의 문장이 말이 되면 번역이 되는데, 맥락이 잡혀야 하는 글은 아직 번역이 안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이건 기계번역의 한계로 작용할 겁니다. 아울러 데이터와 통계를 따른 번역에는 또 다른 한계가 있습니다. 데이터는 ‘기존의 자료’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없고 보수화할 여지가 있습니다. 언어는 창의적이기 때문에 재밌습니다.”

- 언제 행복하십니까.

“번역 제안을 받을 때입니다. 새로 할 일이 생기고, 어떤 책인가 궁금해지고, 또 읽어보고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행복합니다. ‘누군가 내 번역을 필요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뻐집니다.”

지금 정영목이 번역하는 책은 지난해 맨부커상 수상작 <링컨 인 바르도>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남북전쟁 중 11살 아들을 잃은 실화를 바탕으로,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을 엮은 책이다. 배경 설명은 당시의 회고록이나 신문 기사로 대체하고, 이야기는 수많은 인간, 유령의 목소리로만 전개된다. 역시 읽어내기 쉽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한국과 미국, 한국어와 영어, 현대와 근대의 흐릿하고 기묘하고 매혹적인 경계지대를 보여줄 것 같은 책이다. 정영목은 다시 한번 경계지대의 안내자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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