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잘하는 금자씨는 친절하지 않아 멋지다

2020.05.01 16:08 입력 2020.05.01 18:53 수정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SBS 드라마 ‘하이에나’의 정금자가 특별한 이유

“일로 만난 게 아니었다면, 우리 사이 좀 달라졌을까요?”

SBS 드라마 <하이에나>의 마지막 회. 정금자(김혜수)에게 호감을 보이던 케빈 정(김재철)은 이해관계가 충돌하자 아련한 눈빛으로 묻는다. 정금자는 케빈 정의 악수를 받으며 대답한다.

“그나마 일로 만났으니까, 당신을 만나준 거예요.”

지금까지 직장 내 로맨스와, 혼자 착각하는 남자 캐릭터에 관대했던 한국 드라마의 전형성을 깨뜨린 주인공 정금자(김혜수)의 명료하고 힘있는 한마디만으로도 <하이에나>는 충분히 희망적인 드라마였다. SBS 제공

지금까지 직장 내 로맨스와, 혼자 착각하는 남자 캐릭터에 관대했던 한국 드라마의 전형성을 깨뜨린 주인공 정금자(김혜수)의 명료하고 힘있는 한마디만으로도 <하이에나>는 충분히 희망적인 드라마였다. SBS 제공

‘직장 내 로맨스’ 과다 드라마들
현실 속에선 성희롱으로 읽히는
권력 개입된 관계를 연애로 미화

혼자 착각하는 ‘서브남’ 주인공에
금자씨가 날리는 시원한 한 방
“그나마 일이니까 만나준 거예요”

용의주도하게 사람을 이용하고
필요 따라 관계 맺는 ‘일하는 여성’
기존 드라마와 차별화 된 감각

그 순간 정금자는, 기분에도 코라는 게 있다면, 나에게로 와서 박하 향이 되었다. 직장 내 로맨스 농도 과다로 꽉 막힌 코가 뻥 뚫리는 기분?! 정금자와 케빈 정은 협업 관계로 만났다. 한국 생활이 낯설다는 케빈 정의 요청에 따라 정금자는 그의 아들이 초등학교에 등록할 때 동행하기도 한다. 정금자의 캐릭터가 워낙 독보적이다 보니 이 행동을 단순한 호의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케빈 정의 태도는 전형적이다. 공적 시공간에서의 언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업무상의 편의나 위력 관계가 제공하는 친절을 혼자서 ‘하트 시그널’로 해석하는 것.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가야 아름다운 ‘서브남’은 보통 주인공에게 선택받지 못해 퇴장한다. 연애 경쟁에서 탈락하는 구도라면, 문제의 원인은 그의 ‘주인공만큼 충분하지 않은 매력’에 있다. 그러나 정금자는 애초에 이것이 연애의 판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한다. 정금자의 대사가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가 너무나 직장 내 로맨스와, 혼자 착각하는 남자 캐릭터에 관대했던 까닭이다. 삼각관계‘조차’ 되지 못한다고 명확히 선언할 때, 정금자는 연애나 이성적 호감과 무관하게 노동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정금자는 필요에 따라 관계를 맺고 의미 없는 다정함을 베풀고, 때로는 용의주도하게 사람을 이용하기도 한다. 일하는 여성은, 인간은 누구나 그렇다. 정금자의 대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일하는 여성들이 마주치는 세상의 모든 케빈 정이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일 잘하는 금자씨는 친절하지 않아 멋지다

▶‘서브남’ 케빈 정
업무상 편의로 제공한 친절을 ‘하트 시그널’로 본 남자

착각 마세요!

미디어 속 직장 내 로맨스는 성공 신화만을 다룬 자기계발서 같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맺어지고, 현실의 연예인 커플은 동료나 선후배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서사를 전시한다. 실패한 연애, 그리하여 로맨스가 ‘직장’을 위협한 사례, 누군가는 연애라고 착각하고 누군가는 아니라고 절규하는 불균형, 권력관계가 개입한 연애는 성희롱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특수성은 감춰진다. CC처럼, 사내연애는 위험하다는 말이 도시 전설로 떠돌 뿐 구체적으로 왜 위험한지, 어떻게 그 위험을 막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2015년에 나온 무타 가에즈의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박선영 외 공역, 나름북스)의 원제는 “부장님, 그 연애는 성희롱입니다”이다. ‘부장님’에게는 연애, 직원에게는 ‘성희롱’인 이 낙차가 일하는 여성을 위협한다. 기존의 로맨스 코미디 공식을 깨뜨리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웹 소설 원작의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보는 내내 나는 조마조마했다. 부사장이 혼자 사는 비서의 집에 찾아오고, 게스트룸에서 자고 가라고 제안하는 장면은 배우들의 아름다운 외양으로도 커버가 안될 만큼 현실의 폭력과 너무나 가까웠던 것이다.

케빈 정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나마’ 젠틀하게 구애했고 이혼했으며 정금자는 그와 동등한 위치의 법률 전문가다. 대부분의 여성은 정금자가 될 수 없으며 현실은 훨씬 더 남루하고 가혹하다. 20대 중후반, 반짝이는 눈으로 노동시장에 진출했던 친구들이 나를 대나무숲 삼아 달려왔다. 시키지도 않은 연애 토핑을 친구의 피자에 얹어버린 상대는 동기부터 사수, 상사까지 다양했다. 생계와 직결되는 만큼 아무리 말발 좋던 친구라도 ‘사이다’를 날리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상대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끝까지 몰랐다. 연애는 그렇다.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이거 안 시켰어요!” 하고 항의해도 상대는 사과는커녕 “서비스입니다. 많이 드렸어요” 하고 눈을 찡긋댄다. 저기요, 네가 얹어준 오이 때문에 누가 토하고 있는데요, 지금! 사전에 낌새를 감지하고 피하거나, 분위기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에너지는 오롯이 여성의 몫이다. 관계가 끝났을 때의 ‘평판’ 역시 여성에게 훨씬 더 치명적이다. 아차 하는 순간 줄에서 미끄러지면, “<미생>인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부부의 세계>에 강제 출연” 당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감정 노동이나 위협은 수치화되지 않는다.

당장 미디어에서 직장 내 로맨스의 현실(절망)편을 방영하거나, 주인공들이 일만 열심히 하면 해결될까? 그런 것은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연애 안 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잘 만든 작품이라는 보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연애의 첨가 여부가 아니라 작품의 시선과 메시지다. 어떤 장르든 ‘짝짓기’에 몰두한다는 비판은 쉽지만, 장르적 특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드라마에는 드라마에 필요한 문법과 극적 구성이 있고, 인간의 욕망과 상호작용한다. 연애는 그중 동서고금을 막론한 스테디셀러다. 배우 공효진도 힘들 땐 그냥 물에 타서 먹는다는 MSG처럼 배신하지 않는 맛!

연애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갈등 구조를 짜기에 적합하며, 보는 사람의 감정에 쉽게 침투한다. 웰메이드로 칭송받았던 드라마들도 연애의 비중이 작거나 중심이 아닐지언정, 아예 없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연애의 첨가 여부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형성하는 의미나 메시지니까. 게다가 일정한 시공간에서 인물들이 서사를 만들려면 직장 내 로맨스는 불가피하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전염병이 창궐해도 물리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다(<킹덤>을 보라). 쉴 새 없이 부딪치고 진득하게 얽혀야 한다. 그래야 그 과정에서 특별함이 피어난다. 드라마에서 우리는 접점이라고는 없는 두 사람이 퇴근 후 소개팅으로 만나 주로 카톡을 하고 주말에 데이트하는 장면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일 잘하는 금자씨는 친절하지 않아 멋지다

▶‘주인공’ 윤희재
뜨거운 가슴으로 언제든 달려오려는 남자

내가 필요할 때만 받을게!

<하이에나>에도 직장 내 로맨스는 있다. 정금자와 같은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또 다른 주인공 윤희재(주지훈)는 훨씬 더 많이 공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금자와 얽힌다. 그래서인지 여러 가지 쿠션이 있다. 정금자는 연상이고,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동료로 만났다가 이후 윤희재가 정금자의 사무소에 들어간다. 정금자가 일하는 중임을 상기시키며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면 윤희재도 뜨거운 가슴을 누르고 물러선다.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아니기에 다른 드라마와 달리 윤희재는 정금자를 지켜줄 수 없다. 칼 앞에서도 정금자는 맨손으로 홀로 맞선다. 윤희재의 사랑은 그런 정금자를 걱정하고 살피다가 병원에 데려가고, 그만 다쳤으면 좋겠다고 위로하는 데까지다. 윤희재가 주고 싶을 때가 아니라 정금자가 필요로 할 때, 윤희재의 호의는 받아들여진다. 일하는 금자씨는 사랑‘도’ 하지만, 일은 확실히, 사랑은 할랑말랑 하면서 오히려 재미를 극대화한다. 여러 지점에서 작가의 고민이 보인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일 잘하는 금자씨는 친절하지 않아 멋지다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다. 그러나 흠잡을 데 없이 올바른 드라마를 보고 싶다는 게 아니다. 그런 건 도덕 교과서지 드라마가 아니다. 야구장에 가서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의미 없는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냐고 묻지 않듯이. 솔직히 <하이에나>에서도 윤희재가 정금자에게 빠져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때, 두 사람이 진상 커플의 도식을 과장되게 ‘연기’할 때…재미있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로 이상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것에도 끌린다. 사랑에 빠져 눈이 뒤집어지는 이야기? 맛있다. 매일 카페인을 수액처럼 빨며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동료가 상사가 특별한 로맨스 대상이 되는 판타지는 드라마가 선사하는 최고의 위안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야구장에 가서 치어리더의 활용 방식이나 노동 환경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듯이. 현실의 폭력을 인지하고, 그것과 차별화되는 한 끗을 만드는 새로운 해석과 감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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