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했다…진짜일지 모르지만 살아남아 보라는 블랙코미디

2020.05.15 16:10 입력 2020.05.15 16:51 수정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엠넷이 깔아놓은 잔인한 길 ‘로드 투 킹덤’

“여기 진짜 엠넷이다.”

엠넷의 경연 프로그램 <로드 투 킹덤> 첫 화에서 참가자는 말한다. <로드 투 킹덤>은 작년에 걸그룹 여섯 팀이 경연해서 큰 인기를 끌었던 <퀸덤>의 남자판으로, 일곱 팀의 보이그룹이 출연한다. 대사만 놓고 보면 어떤 프로그램인지 감이 안 온다. 잔인함에 탄식하는 장면은 박진영이 프로듀싱한 노래 초반 속삭이는 ‘제왑삐’처럼 모든 엠넷 제작 경연 프로그램에 반드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출연자를 천국과 지옥의 샤부샤부에 넣었다 뺐다 할 것이니 모두 와서 구경하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b>어떤 길이 기다릴까?</b> 지난해 걸그룹 여섯 팀의 경연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퀸덤>의 남자판으로 새롭게 선보이는 엠넷의 <로드 투 킹덤>. 더보이즈, 골든차일드, 온앤오프, 베리베리, 원어스, TOO, 펜타곤이 ‘킹덤’을 향한 경합을 벌인다. <로드 투 킹덤> 홈페이지 캡처

어떤 길이 기다릴까? 지난해 걸그룹 여섯 팀의 경연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퀸덤>의 남자판으로 새롭게 선보이는 엠넷의 <로드 투 킹덤>. 더보이즈, 골든차일드, 온앤오프, 베리베리, 원어스, TOO, 펜타곤이 ‘킹덤’을 향한 경합을 벌인다. <로드 투 킹덤> 홈페이지 캡처

‘진짜 엠넷’이라는 말에는 엠넷이 추구하고 표방하는 정체성이 담긴다. ‘경쟁은 잔인한 것’이고, 엠넷은 그러한 본질을 냉혹한 룰로 은유하는 대리인이다. 그러니 엠넷의 창의성에 마음껏 탄식하고 살아남고자 춤추되, 원망하거나 분노하지는 말지어다. 엠넷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 몸담고 있는 경쟁 사회가 냉혹할 뿐이니. 네가 간절하면 (꿈과 노력만 있으면) 응답이 있을 것이다. 진짜죠?! 어어, 아니 뭐~가짜일 수도 있고~.

잔인함은 오랫동안 경쟁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여겨졌다. 위기와 역전 속에서 출연자는 울고 웃고 성장하고 패배하거나 승리한다.

그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는 시청자에게도 ‘과몰입’이 발생한다. 이때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인다. 동경, 성애, 모성애(부성애), 동지애, 혹은 여러 가지가 뒤섞인… ‘정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개념인 정동은 ‘affective’의 번역으로, 질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신체적·정신적 반응을 뜻한다. 네, 화면 속 그 눈망울과 마주쳤을 때!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겁니다! 우리는 종종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감정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느끼고, 그로부터 촉발되는 행위를 한다. 정동은 의식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감정과 구별되며 운동이나 움직임 속에 있다.

잔인함의 세팅은 정동을 극대화한다. 어느 프로그램이든 출연자는 탈락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거나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시청자는 그들을 지켜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불타고, 실제로 투표를 독려하고자 상품을 거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정동을 더 많이 끌어낼수록 생존 가능성이 커지기에 출연자는 ‘정동노동’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감정을 자원화하고 창출하는 비물질 노동 개념이고, 돌봄을 주로 하는 서비스 산업 전반에 걸쳐 이용된다.

감정노동이 좀 더 익숙할 것이다. ‘감정노동’이 “임금을 받기 위해 외부로 드러나는 얼굴 및 신체적 표현을 만들고자 감정을 관리하는 행위”(혹쉴드)로 착취와 소외를 강조한다면, 정동노동은 “해당 노동이 무언가를 ‘촉발’하는 운동 상태에 놓여 있음을 부각하는 용어”(하트와 네그리)다. 피에로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정동노동을 한다. 그런데 근무시간이라서 슬픔을 참고 우릴 보고 웃는다면 피에로는 감정노동도 겸하는 중이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또 시작했다…진짜일지 모르지만 살아남아 보라는 블랙코미디

천국과 지옥의 샤부샤부에
출연자를 넣었다 뺏다 할 것이니
모두 와서 구경하라는 선전포고

“여기 진짜 엠넷이라구?”
조작 사건으로 신뢰를 잃었으면
다른 패를 들고 나와야 했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희로애락에 과몰입하던 시청자도
한순간 차가워질 수 있음을

경연 프로그램의 정동노동에는 친절과 다정을 넘어서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근성이 있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되고, 경쟁관계지만 양보도 해야 하고, 자유롭고 반항적이되 프로그램의 룰과 제작진에게는 성실하게 임하며 순종해야 한다. 시청자의 요구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듯 묘하고 까탈스럽다. 또한 정동노동은 인간관계와 교류로 확대된다는 특징이 있다. 출연자끼리 나누는 우정이나 유사 가족관계는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최대 2명을 뽑을 수 있는 투 픽 제도나, 다른 그룹의 멤버끼리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퀸덤>의 미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적 영역이던 친밀감과 교감마저 이제는 자원이자 도구가 되는 것이다. 눈에 띌 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음이탈보다 더 큰 위험 요소다. 시청자는 시청자대로, 같은 출연자를 응원하는 개인과 정서적 공동체를 꾸리기도 한다.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가 감정노동이나 정동노동에서 소외된다는 것 역시 이미 많은 연구에서 다루었다. 경연 프로그램 출연자의 대부분은 아이돌 연습생과 아이돌 그룹이다. 정동노동자인 아이돌은 직업 특성상 여러 차원에서 강도 높은 통제를 받고, 쉽게 착취에 노출된다.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하고 아이돌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정동노동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활동기가 아니어도 ‘떡밥’을 줘야 하고, 방송국을 벗어나도 휴대폰만 켜면 그곳이 어디든지 노동의 현장이다. 차나 집에서 라이브를 하는 것은 물론 사적인 동선까지 찍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로 유추가 가능해진 아이돌의 친구 관계는 ‘영업’의 전략이나 관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많은 아이돌이 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시즌 <퀸덤> 출연자였던 오마이걸의 지호가 심리적 불안증세로 활동을 중단했다가 최근 복귀했다.

우주소녀의 다원과 트와이스의 미나는 활동 중단 상태고, 몬스타엑스의 주헌과 세븐틴의 에스쿱스가 활동 중단 후 복귀했다. 5월10일 데이식스 역시 새 앨범 발매를 하루 앞두고 일부 멤버의 불안증세로 활동 중단 공지를 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로드 투 킹덤>은 ‘살아남으라’는 절박함과 ‘잔인함’을 내세운다. 노골적으로 그룹의 서열을 매겨가면서 말이다.

<로드 투 킹덤>은 이름이 의미하듯 ‘킹덤으로 가는 길’이다. 일종의 예선전에 해당한다. <프로듀스> 시리즈 등에서 연습생들은 기획사의 규모에 따라 서열이 나뉘고, 순위가 표시된 이름표를 달고 다녔다. 데뷔는 달콤한 꿈이자 문턱만 넘어서면 계속 이어지는 꽃길로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로드 투 킹덤>은 오프닝부터 ‘1위 가수’ 뒤에 서 있는 인지도 낮은 그룹의 모습을 부각한다. <퀸덤>이 연차가 쌓이고 인지도가 있는 걸그룹이 출연해서 평소에 제약이 많았던 콘셉트 너머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과 다르다. 더 이상 데뷔는 생존이 아니니, 끝없는 노력과 성취와 가진 모든 패를 까는 진정성을 보여달라는 판이다. 그래야 ‘업그레이드’되어서 ‘킹덤’에 ‘합류’할 수 있다는 도식은 출연자에게 또 다른 전략과 감정 관리 기술을 요구한다. 출연한 그룹 멤버 중 일부가 <프로듀스 101> 시즌 2에 출연했던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익히 알려졌듯 엠넷은 <프로듀스> 시리즈와 <아이돌 학교>의 조작 사건으로 신뢰를 잃었다. 그래서 살아남으라는 구호는 어딘지 블랙코미디처럼 여겨진다. 물론 예능에서 재미는 중요하고, 콘텐츠에서 편집과 연출을 무작정 배제하기는 불가능하다. 오디션 쇼는 서사를 지닌 드라마 장르에 가깝고 출연자 역시 적절한 캐릭터를 고민하고 연기한다는 특수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은 허구의 서사가 아니다. 개인의 인생과 내면, 감정, 관계이다. 지금까지 정동노동을 착취하고 정당화하는 근거가 무너졌다면, 좀 다른 패를 들고 나와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아~살벌하죠? 무자비하죠? 엠넷이죠?”의 태도를 유지한다면, 성실한 출연자는 주어진 역할대로 감탄해도 시청자의 눈동자는 한없이 차가워지는걸.

[이진송의 아니 근데]또 시작했다…진짜일지 모르지만 살아남아 보라는 블랙코미디

경쟁과 생존이 조작된 각본이라면, 잔인함도 필연이 아니라 조율할 수 있는 장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설정이 경연 프로그램에는 넘쳐난다. 프로그램의 재미나 출연자의 성장보다, 대부분 언제든 출연자를 벼랑에 매달 수 있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의식 같다. 그래도 <로드 투 킹덤>은 여러 그룹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고, 방송은 시작되었다.

<로드 투 킹덤> 초반은 화기애애했지만, 3화 예고에서 한 출연자는 눈물을 터뜨린다. 우리는 쇼가 사연이 될 수 있는 감정을 선별해 저잣거리에 거는 장면을 또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로드 투 킹덤>이 어디로 갈지, 그 과정에서 또 어떤 것을 짓뭉개고 끌어올릴지, 어떤 정동이 새로운 경제적 가치에 편입하는지 지켜본다.

·참고자료: 방희경·오현주, ‘아이돌의 정동노동과 노동윤리’, <한국언론정보학보> vol.91, 한국언론정보학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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