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 소재로 했으나 ‘삶’에 주목…피해자가 ‘이름’ 찾아가는 과정

2024.04.14 18:08 입력 2024.04.14 18:18 수정

[인터뷰] 영화 ‘정순’ 정지혜 감독

영화 <정순>의 주인공 정순(김금순·가운데)은 견과류 식품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직원 영수(조현우)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영화 <정순>의 주인공 정순(김금순·가운데)은 견과류 식품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직원 영수(조현우)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연인과 은밀하게 찍은 영상이 동의 없이 유포된다. 영상을 퍼뜨린 남성과 피해자 여성은 같은 직장에 다닌다. 동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여성의 일상은 빠르게 무너진다.

기사로 흔히 접하는 디지털 성범죄의 사례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당신은 가해자, 피해자로 각각 청년 여성과 남성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디지털 성범죄 피의자 5명 중 1명은 40대 이상이다. 피해자의 경우 40대 이상은 5%를 밑돌지만 낮은 신고율을 고려하면 실제 피해는 훨씬 많을 것이다.

17일 극장을 찾는 영화 <정순>은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통념을 뒤집는다. 지난 11일 서울 동대문구의 홍보사 사무실에서 만난 정지혜 감독(29)은 “집에서는 엄마로, 공장에선 이모나 아줌마로 불리는 인물이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영화를 소개했다.

주인공은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정순(김금순)이다. 오래 전 사별한 그는 결혼을 앞둔 딸 유진(윤금선아)을 살뜰히 챙긴다. 힘들지만 밝게 살아가던 정순 앞에 새 직원 영수(조현우)가 나타난다. 어느새 연인이 된 두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순이 속옷 차림으로 노래하는 영상이 퍼진다.

<정순>은 성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정순이 당하는 디지털 성범죄를 볼거리로 전락시키지 않고도 그 끔찍함을 전달하는 방법은 ‘노래’였다. “영상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정순의 노래를 떠올렸죠. 정순이 노래하는 장면을 영수가 촬영한다면 그 이후엔 정순 목소리가 나오기만 해도 관객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순은 일상을 꿋꿋이 이어나간다. 세탁이 끝난 옷을 탁탁 털어 널고 딸에게 가져다 줄 반찬도 만든다. 그러다 한 순간 무너지지만 다시 일어난다.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영화지만,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품는 것은 절망이 아닌 희망이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라는 소재 자체보다 정순이란 한 인물의 삶을 관객이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불리기조차 쉽지 않은 정순이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정순>은 정 감독이 대학 시절 한 식품공장에서 8개월 간 아르바이트한 경험에서 출발했다. 백색의 작업복과 위생모를 쓰고 에어샤워기를 통과하는 노동자들의 이미지가 일단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영감을 준 것은 ‘이모’라 불리는 중년 여성들이었다. “공장에는 새로 온 사람을 배척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처음엔 의문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의 불안정한 노동환경이 보이더라고요. 10년을 일해도 비정규직이고, 쉽게 없어질 수 있는 자리이니 새로 들어온 사람은 ‘내 자리를 빼앗을지 모르는 존재’인 거죠.”

‘이모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오래 품었다. 정답을 찾지 못하던 때 만난 디지털 성범죄 통계가 실마리가 됐다. 정 감독은 “디지털이라는 특성 때문에 젊은 세대 만의 문제로 인식되지만 많은 가해자가 중년 남성임을 알게 됐고 <정순>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정순>으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등 9개 상을 휩쓸었다.

정 감독은 2019년 <정순>의 촬영을 맡은 정진형 감독과 영화제작사 시네마루를 설립했다.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다. 경남 양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의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는 ‘지역에서 영화하기’를 꿈꾼다. <정순> 역시 고향 양산에서 찍었다.

“저는 부산·경남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어요. 이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제가 쓰는 모든 이야기의 배경도 이곳이에요. 촬영 인력이 서울에 몰려있어서 스태프 구하기가 어렵긴 해요. 그래도 ‘아직 젊으니까, 한 번 부딪혀보자’ 하는 패기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20대 후반인 정 감독은 <면도>(2017), <매혈기>(2018), <버티고>(2019) 등 단편을 통해 사회 약자들에 주목해왔다. 차기작으로는 지적장애 부모를 둔 여중생의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정순>과는 톤앤매너가 아예 다른 작품입니다. 발랄하고 코믹한 요소가 들어가 있는데 저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에요.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 시선이 무겁지만, 저는 가까운 이웃들의 영화로 만들 생각입니다.”

영화 <정순>을 연출한 정지혜 감독은 중년 여성도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영화 <정순>을 연출한 정지혜 감독은 중년 여성도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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