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랑종> ‘악’과의 대결에서 ‘선’의 포기를 종용하는 나홍진의 세계관

2021.07.16 16:17 입력 2021.07.16 16:31 수정
칼럼니스트 위근우

신은 많은데, 선한 신은 없다…오직 악만이 존재한다는 끔찍한 서사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에 관한 석 달간의 기록을 담은 나홍진 제작,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영화 <랑종>.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에 관한 석 달간의 기록을 담은 나홍진 제작,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영화 <랑종>.

※본 기사는 영화 <랑종>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홍진 제작,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영화 <랑종>은 끔찍하다. 오컬트 공포 영화로서 영화 종반부에 벌어지는 악령의 잔인한 학살극 때문만은 아니다. 개봉 전부터 본 사람과 보지 않았던 사람 모두에게 논란이 됐던 동물 학대나 여성 캐릭터의 성적 소비 등 다분히 폭력적인 포르노그래피 때문만도 아니다. 사실 후자의 문제는 작지 않은데, 그것조차 부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랑종>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 강조하는 메시지는 끔찍하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악(령)의 승리다. 거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영화의 형식은 그 이상을 말한다. <랑종>은 악의 불가항력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악 앞에 선 선의 무기력함, 혹은 선의 부재를 학습시키는 영화다. 그래서 끔찍하다.

제작자 나홍진의 이름과 무속 신앙이라는 소재부터 많은 이들이 <랑종>과 나홍진의 연출작 <곡성>과의 유사성을 기대할 테고, 또한 실제로 둘은 많은 것을 (안 좋은 의미에서) 공유하고 있지만, <랑종>의 줄거리는 <곡성>만큼 관객을 의혹에 빠뜨리진 않는다. <곡성>이 사건의 배후에 초현실적인 힘에 있는지 아닌지, 타지인 일본인(구니무라 준)이 악마인지 아닌지, 무속인 일광(황정민)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의도적으로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는 반면, <랑종>은 서사의 빈칸이 많되 딱히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거나 헷갈릴 만한 요소가 별로 없다. 태국 이산 지역에 가문 대대로 ‘바얀’이란 신을 모시는 무당(랑종)인 님(싸와니 우툼마)이 있고, 그에 대한 다큐를 찍던 촬영팀이 님의 형부 장례식에서 만난 님의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이상 행동을 발견하고 이후의 과정을 다큐에 담아낸다. 아주 작은 반전들은 있지만 <랑종>의 서사는 일관되게 밍이 악귀에 잠식되어가는 과정과 그걸 막기 위한 님의 노력, 그리고 악귀와의 최종 대결을 다룬다. 의문과 미지로 가득한 <곡성>의 세계와 달리, 여기서는 하다못해 다큐를 찍는 이들조차 빙의라는 초현실적 현상을 큰 거부감이나 의문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니 관객으로서도 갸우뚱할 필요 없이 이건 초현실적 존재가 전제된 오컬트 공포 영화라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된다. 정말 무섭더라는 시사회 후기나 역시 공포에 방점을 찍은 프로모션은 나홍진과 피산다나쿤 두 스타 창작자가 만들어낼 웰메이드 오컬트 공포에 대한 기대감으로 소급하며, 자신의 장르적 성격을 숨기지 않는 <랑종>의 세계관과 악령과의 대결을 향해 직진하는 이야기, 그리고 <블레어 위치>의 성공 이후 다수의 공포 영화에서 검증된 페이크 다큐라는 형식은 이에 대한 필요조건을 충족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밍의 빙의에 대해 처음엔 모계 전승인 바얀 신의 내림인 줄 알았다가, 밍과 근친상간 관계였던 자살한 오빠의 원혼을 의심했다가, 최종적으로 밍의 부계로부터 내려져온 저주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갈수록 커지는 초자연적 악의 실체는 그럼에도 경외로서의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 어떠한 상상력도 자극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악은 앞의 4분의 3가량은 밍이라는 젊은 여성의 신체 훼손에만 집착하고, 나머지 4분의 1에선 밍을 조종해 학살극을 벌이는데, 이 두 가지 모두 밍이라는 인물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 이 강력한 악귀는 미지의 존재라기보다는 차라리 나홍진의 전작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의 오컬트 버전에 가까워 보인다. 조금 도식적으로 말해, 밍이 겪는 신체 훼손과 빙의 상태에서 벌이는 무의미한 섹스신은, 여성 피해자가 겪는 강간과 신체 훼손의 이미지에서 남성 가해자의 존재와 남성 창작자의 관음적 시선만 쏙 괄호치고 그 자리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를 끼워 넣은 것에 가깝다. 즉 <랑종> 속 악귀의 초월성은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운 불가해함보다는, 여성에 대한 가학적 페티시에 대해 구체적 책임만 회피하기 위한 형태로 등장한다.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에 관한 석 달간의 기록을 담은 나홍진 제작,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영화 <랑종>.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에 관한 석 달간의 기록을 담은 나홍진 제작,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영화 <랑종>.

처음부터 나홍진의 시나리오 원안에 제시됐고, 피산다나쿤 감독이 “관객이 좀 더 생생하게 이야기를 느끼려면”(<씨네21> 인터뷰) 필요했다고 본 페이크 다큐라는 형식이 굉장히 사악해지는 건 이 지점이다. 중립적 관찰자를 가장한 페이크 다큐의 카메라는 밍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자연스러운 것, 불가피한 것으로 그려낸다. 앞서 말한 밍이 빙의된 상태에서 벌인 섹스 장면이 밍의 회사 CCTV에 찍힌 흑백 영상으로 등장하는 게 역겨운 건 그래서다. 왜 빙의를 설명하기 위해 꼭 섹스 장면이 들어가야 하느냐는 당연한 질문을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CCTV의 형태로 재현될 때 여성의 나체와 섹스를 굳이 시나리오에 넣어 연기를 시키고 촬영한 창작자의 존재와 의도는 교묘히 지워진다. 그저 벌어진 일을,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보여준다는 식의 기만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적 파운드 푸티지 스타일과는 달리 섹스 신의 여체를 선택적으로 선명하게 클로즈업하는 건 더 역겹다. 역시 몰래 설치한 야간용 관찰 카메라로 밍이 집의 반려견을 그대로 끓는 물에 집어넣는 가학적 장면을 확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불편한 장면이라 문제인 게 아니라, 그 불편함을 따져 물을 윤리적 개입을 관찰 카메라의 시선으로 미리 차단하는 게 문제다. 밍에게 빙의된 악령이 벌이는 깽판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가장한 카메라는 그저 무기력하게 이 모든 것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한다.

아마도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을 엑소시즘과 악귀의 반격이 담긴 종반부는, 이처럼 아무 개입도 질문도 할 수 없이 벌어지는 모든 일을 승인하는 무기력한 관찰자의 위치에 관객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유사 공포를 만들어낸다. 밍을 위한 엑소시즘을 준비하던 님이 돌연사하지만, 그의 동료 엑소시스트는 포기하지 않고 의식을 진행한다. 물론 충분히 예측 가능하게 엑소시즘은 실패하고, 밍과 그에게 붙었던 악귀에 빙의된 엑소시스트의 제자들은 카메라를 든 다큐 제작자들을 공격한다. 역시 충분히 예측 가능하게, 어두운 밤 적외선 카메라의 녹색 화면엔 이 학살극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것이 유독 무섭게 느껴지는 건,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소용없다는 카메라의 체념적 관점이 관객의 시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즉 이 두려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영화가 얼른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당장은 효과적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끝난 즉시 아무런 인상적 장면도 남기지 못한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이것은 <랑종>이 기대만큼 무섭진 않은 영화, 상당 부분 예측 가능한 영화라는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 어떤 의미로든 <곡성>이 <랑종>보다 잘 만든 작품이지만, <랑종>은 단순히 <곡성>보다 못한 영화라기보다는 <곡성>에서 보여준 악에 대한 무기력함이라는 테마를 더 노골적으로 밀어붙인 영화다. 영화 말미 엑소시즘 의식에 참여했던 밍의 어머니이자 님의 언니인 노이(씨라니 얀키띠칸)는 갑자기 바얀 신을 영접했다고 주장하며 본인이 직접 의식을 진행하다가 고의로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려 죽게 만든다. 이에 대해 피산다나쿤 감독은 본인의 의견은 보류한 채 “바얀 신이 노이에게 들어갔거나, 다른 악령이 노이에게 들어갔거나, 아니면 노이가 정신이 나갔거나” 세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노이가 바얀의 이름으로 밍의 악귀를 쫓으려다가 결국 밍에게 제압당해 죽은 것을 보면 역시 노이는 바얀에게 빙의된 것에 가까워 보인다. 반면 학살이 끝난 뒤 에필로그처럼 추가된 님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장면에서 그는 사실 자신은 바얀 신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다분히 회의적 입장을 고백한다. 이것은 신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영화 내내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고 심지어 넘쳐났다. 본질은 신이 없는 게 아니라 엄청 많은데 님이 믿던 ‘선한’ 신이 없는 것이다. 보살피는 존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악만이 초월적이고 실재한다. 이것은 오컬트의 형식을 경유한 세상에 대한 저주다. 선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포기를 종용하는 것. 그러니 무서운 건 영화가 아니다. 이런 발화가 예술의 이름으로 너무 쉽게 승인된다는 게 진짜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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