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자부심…참고 살다 병됐다”

2004.02.12 18:46

=[잊혀져가는 독립 유공자들](2)고통 대물림, 가난한 후손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은 더욱 더 고달프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은 일제때는 가산몰수나 가정의 풍비박산으로 이어졌고 해방된 뒤에도 친일파가 득세한 대한민국에서 ‘업보’로 다가왔다. 당대 엘리트와 선각자들이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가난은 대물림되고 배움의 기회도 박탈됐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란 자부심은 속으로 꾹꾹 눌러두고 홀로 삭여야 하는 병이 되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나는 길 역시 멀고 험했다. 국가보훈처로부터 보훈혜택을 받는 유공자 후손은 모두 5,154명. 하나같이 취재진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독립유공자의 손자 이모씨. 생계를 위해 수십년간 칼 가는 일을 하다가 그나마 몇해 전부터는 고혈압 때문에 등져 누웠다. 며느리를 통해 겨우 전화통화가 된 이씨는 “내가 살아온 삶을 외부에 알리는 것은 조부를 욕보이는 일이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부산 전포동에서 만난 김혜숙 할머니(68)는 국내파 독립운동가 김화진 지사(1904~1946)의 둘째딸. 김지사는 1922년 일본에서 ‘반제식민지운동’을 하다가 1928년 귀국, 독립운동과 농민운동을 했고 징용에 반대하다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아버지가 농민단체에 몸 담았다는 이유로 좌익분자로 매도됐지요.”

좌익으로 몰린 장인 때문에 김씨의 남편은 취직조차 할 수 없었다. 광복 이후 연좌제는 시퍼런 칼날 같았다. 사업마저 번번이 실패했고 남편은 지난 86년 사망했다. 김씨는 “남편이 날 만나지 않았으면 잘 살았을 것”이라며 “장인 때문에 실패한 인생으로 끝났다”고 눈물을 흘렸다.

남편의 죽음 뒤 삶은 더 고달팠다. 1986년부터 2001년까지 지하 단칸방에서 아이들 5명을 키웠다. 지금은 13평짜리 전세아파트에서 96세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 김씨는 매달 국가로부터 1백만원 안팎의 보훈금을 받는다. 집세를 내고나면 63만원이 남는데 이 돈으로 생활비와 병든 시어머니 약값을 모두 댄다. 자식들의 도움은 받지 않는다. 김씨는 “가난에 쪼들려 교육조차 제대로 못시킨 처지에 무슨 염치로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겠느냐”고 반문했다.

아버지에 대한 유공은 96년에서야 이루어졌다. 기록이 늦게 발견된 데다 농민운동을 했다는 전력이 걸림돌이었다. 김씨는 “독립운동가를 좌익사범으로 몰아 힘든 삶을 살았지만 나중에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분들의 뜻과 업적이 역사 속으로 파묻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며 “목숨 걸고 싸운 그분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라고 말했다. 김씨는 “가족들에게 가난과 고통을 남기신 아버지이지만 너무나도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광주사범대학에 재학하면서 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김상중 선생(1924~1996)의 딸 김현씨(48)도 한사코 만남을 거부했다. 김씨는 여러차례 설득 끝에 겨우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신 아버지도 있는데 내 체면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며 취재를 허락했다.

김씨는 서울 신월동의 보증금 3백만원짜리 사글세 방에서 남편·아이들과 함께 산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해 혼자 일해 먹고 살지만 하루하루가 힘겹다. 여동생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다. 형제들이 동생 병원비를 나눠내지만 다들 형편이 어려워 여의치 않다.

김씨는 “병 걸린 동생이 보훈병원에서 치료도 받을 수 없고 대출도 안되니 막막하다”며 미진한 보훈혜택에 대한 섭섭함도 드러냈다. 그는 “잘 살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을 보면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다”며 “보훈은 둘째치고 역사라도 바로 잡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곽기수 할아버지(71)는 곽재기 의사(1893~1952)의 손자. 곽의사는 1920년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기 위해 정탐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돼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곽할아버지는 서울 휘경동 17평 임대아파트에서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어린 시절을 우선 떠올렸다. “독립운동하던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일본 순사들한테 엄청나게 고초를 겪으셨어. 그 기억은 평생 못잊어.”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물려받은 것도 배운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할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다”며 “오히려 ‘난 독립유공자 손자’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슴속에 담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가슴속 ‘자부심과 긍지’만으로는 가난을 해결하지 못했다. 광복 뒤에도 사글세 방을 전전하며 힘든 시절은 계속됐다. 2001년 은행대출 3천만원을 받아 지금의 임대아파트로 들어왔지만 생활비 마련을 위해 쓴 카드빚이 그동안 2천만원으로 불었다. 은행측은 아파트를 가압류하겠다고 나왔다.

곽할아버지는 “친일파 후손들은 잘살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현실이 분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그렇지만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독립운동사와 운동가들이 잊혀지는 현실이 더 안타깝다”며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라고 말했다.

오철성씨(59)는 오면직 지사(1894~1938)의 손자. 1935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을 습격, 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살해하려다 체포돼 이듬해 해주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오씨는 고등학교 입학 이후부터 자취를 하며 혼자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했다. 오씨는 제대 뒤 이삿짐센터 운전기사로 시작해 30년 넘게 운전을 하고 있다. 삶은 고달팠지만 “밥 세끼 먹고 사는 건 다 할아버지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던 그분들의 뜻이 잊혀지고 있는 게 안타까울 뿐”이라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찾고 검증하는 작업이 더 치밀하게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사회부 김종목·선근형·이지선 기자, 전국부 권기정·사진부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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