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방을 아시나요”

2017.07.30 10:07

1960년대 부산 범일동의 조선방직. 중앙에 자성대가 보이고 오른쪽 하단에 공장건물이 보인다./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60년대 부산 범일동의 조선방직. 중앙에 자성대가 보이고 오른쪽 하단에 공장건물이 보인다./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부산의 대표적인 별미로 ‘조방낙지’를 꼽는 이들이 많다. 상당수 부산사람은 매콤한 것이 당길 때면 조방낙지가 떠오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산의 젊은이들 가운데에도 조방낙지의 ‘조방’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조방’은 일제가 목화의 재배와 매매, 면사방직, 판매를 목적으로 100년 전인 1917년 부산 범일동 일대에 세운 ‘조선방직주식회사’를 말한다. 대지 8만평 위에 세운 이 공장은 일본자본이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공장이자 국내 최대기업으로 식민지 노동약탈의 상징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생산한 면화를 싼값에 사들이고 싼 노동력을 이용해 옷감을 만들어 비싼 값에 되팔아 많은 이윤을 남겼다.

1917년 일본 자본에 의해 부산 범일동에 설립된 조선방직./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17년 일본 자본에 의해 부산 범일동에 설립된 조선방직./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방직은 1920년대에 직공수가 3200명이나 됐고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노동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1922~23년 1년 동안 6차례의 대규모 파업 투쟁이 벌어졌다. 12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 때문이었다. 1930년 1월에는 임금 30전을 80전으로 인상할 것,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작업 중 부상자 치료비 부담 등을 요구하며 3000여 명이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 파업은 1930년대 일제타도와 반제운동으로 발전했고, 다른 공장에도 영향을 줘 영도의 조선소를 비롯해 각 정미공장, 고무공장 등의 노동쟁의에 영향을 끼쳤다. 일제 때 조방 앞 낙지볶음 집에서 노동자들은 낙지볶음과 함께 술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고 이 것이 훗날 조방낙지의 시작이 됐다.

광복 후에도 조선방직은 한국 최대 면방직회사였지만 한국전쟁이후 사주의 잦은 교체와 경쟁업체의 급속한 생산력 신장에 따라 경쟁력을 잃고 1969년 부산시가 인수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산시민회관, 아파트, 자유시장, 평화시장, 호텔, 예식장 등이 들어섰고 1980년대까지는 시외버스터미널도 위치해 조방은 부산의 유통·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시외터미널과 신발·섬유업체들이 이전하고 폐업하면서 상권도 가라앉았다.

조방 앞에 설치되는 포토존

조방 앞에 설치되는 포토존

부산 동구는 조선방직 설립 100주년을 맞아 조방상권 활성화와 보행환경 개선 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30일 밝혔다.

‘사랑과 프로포즈’라는 주제로 거리가 확 바뀐다. 차로를 축소하고 인도를 넓히고 있다. 전선과 전봇대가 사라지고 지하에 매설하는 지중화 공사가 끝났다. 화단과 수백 개의 조명을 설치 중이다. 사랑의 느낌과 감정을 빛, 음악과 융합한 조형물도 설치된다. 8월 초 조형물 설치를 완료하면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 ‘조방 LOVE U 빛축제’를 열기로 했다. 축제기간에는 금·토요일 오후 5~8시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중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치맥 페스티벌과 코레일 열차관광상품도 검토 중이다.

조방 일대에 설치되는 조형물 ‘사랑의 소나기’

조방 일대에 설치되는 조형물 ‘사랑의 소나기’

동구는 “조방 앞은 역사적 의미가 깊고 과거 부산시민이 가장 많이 찾는 번화가로 명성이 높았으나 옛도심 지역의 도시기능 쇠퇴로 조방상권도 많이 위축됐다”며 “사랑과 프로포즈의 거리 조성과 빛 축제를 계기로 옛 명성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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