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빈곤

‘돌봄 노동의 경력 인정 조례’ 추진하는 두 여성 “궁극적으로는 돌봄 노동도 소득 보전해줘야”

2023.04.02 21:43 입력 2023.04.02 23:37 수정

(중) 가족 돌봄과 일 병행, 30세 ‘영케어러’의 시간

장태린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사무국장(왼쪽)과 김가영 부위원장이 지난 3월24일 서울 마포구 정의당 장혜영 의원 지역사무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장태린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사무국장(왼쪽)과 김가영 부위원장이 지난 3월24일 서울 마포구 정의당 장혜영 의원 지역사무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정의당 서울 마포구위원회 김가영·장태린씨

‘지자체가 돌봄 증명서’
전국서 첫 조례 제정 추진
“보호장치 없는 돌봄 노동
인식의 전환 계기 만들 것”

어린 자녀나 아픈 가족을 돌보는 데 쓴 시간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영국에서는 만 16세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당 최소 35시간의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간병인 수당(Carer Allowance)을 받는다. 주급 69.70파운드(약 11만1550원)이다. 한국에선 고용보험 가입자는 출산 후 1년간 육아휴직 급여를 받는다. 만 86개월 미만 아동을 가정에서 보육하면 부모급여·양육수당을 받을 수 있고, 노인장기요양서비스 가족 요양비, 산업재해보험이 주는 가족 간병 급여도 있다.

한국에선 돌봄자에 현금성 급여보다는 돌봄을 받는 이에 맞춘 서비스 지원이 보편화돼 있다. 보육·요양시설 등 기관에 돌봄을 맡기지 않는다면, 아이돌봄서비스나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노인장기요양서비스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서비스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가족(보호자)이 메울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맡으면 비용이 발생하는 유급 노동인데 가족이 돌보면 무급 노동이 된다.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 마포구에서 ‘돌봄의 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 조례’를 만들겠다고 나선 정의당 마포구위원회의 김가영 부위원장, 장태린 사무국장을 지난 3월24일 망원동 장혜영 의원 지역사무소에서 만났다.

김 부위원장은 “2021년 11월 서울 성동구에서 ‘경력보유여성 등의 존중 및 권익 증진 조례’를 처음 만들었을 때, 평소 가지고 있던 비슷한 문제의식을 마포구에서도 풀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성동구의 조례는 경력보유여성(경력단절여성을 대체한 용어)에 한해서지만, 전국 최초로 돌봄 노동의 경력을 인정하도록 권장하는 내용을 담았다.

정의당 마포구위원회에서 만든 조례 가안을 보면 ‘돌봄’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환자나 노인, 어린이와 같은 사람을 돌보는 모든 활동”으로 정의한다. 지자체가 돌봄을 한 이들에게 해당 기간의 경력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고, 지자체 및 산하기관 등에 증명서를 제출하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조항도 담겼다.

2021년 가을부터 조례 제정을 위해 지역간담회, 주민청원 등을 진행했다. 타 지역에서도 관심이 있다며 문의가 왔다. 당시 거리에서 ‘엄마라는 당신의 시간, 소중한 경력입니다’란 문구가 쓰인 현수막을 들고 주민청원을 받았다. 이 현수막 문구는 남녀노소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김 부위원장은 “한 할머니가 와서 내용을 듣더니 ‘그런 종이 쪼가리(경력 증명서)라도 하나 줘봐’라고 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다만 ‘엄마’라는 표현을 쓰는 데 대해선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현실을 고착화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고민이 들었고, 조례에 대해서도 같은 지적이 나왔다. 장 사무국장은 “주민들에게 호소할 때는 직관적으로 돌봄이 노동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도록 (실제 돌봄을 많이 하는) ‘엄마’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돌봄자들의 목소리는 어땠을까. 김 부위원장은 “파킨슨병이나 중증치매가 있는 가족을 돌보는 분들은 생활반경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필요한 의료서비스도 제때 받기 어렵다고 했다”면서 “외출할 때도 돌봄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돌봄 대상에 미안함을 갖게 돼 심리적 부담감도 매우 크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24시간 쉬지 않고 노동하는 것인데, 이들을 돌볼 보호장치는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해당 조례가 제정된다고 해도 실제 돌봄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미미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지금의 돌봄 정책은 돌봄 수요자 중심이기 때문에 돌봄하는 이의 시간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김 부위원장은 “궁극적으로는 돌봄 노동에 대해 소득 보전을 해주는 형태로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은 가려진 돌봄 노동을 눈에 보이게끔 하고 싶었고, 조례 제정을 추진하는 과정 자체가 이러한 인식 전환을 위한 캠페인 성격도 강했다”고 했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정의당 마포구위원회의 활동도 주춤했고 구청장과 구의회 구성도 바뀌면서 조례 제정은 아직 결실을 보지 못했다. 장 사무국장은 “마포구의회에서 최근 ‘가사스트레스 해소 지원 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면서 “가사(청소, 세탁, 육아 등 가정의 일상적인 일)에 따른 정신적·신체적 문제를 지자체가 해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계기 삼아 가족의 돌봄경력 인정 조례 제정 논의도 재점화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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