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로 본 한강과 5·18

2017.05.18 11:29 입력 2017.05.18 14:41 수정

소설가 한강이 아동문학으로서 죽음을 진지하게 다룬 스웨덴 작가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5·18과의 관련성을 18일 이야기했습니다.(▶관련기사) 지난해 5월 향이네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 5·18을 되돌아봤습니다. 우리 다시 같이 보시죠.

소설가 한강의 여섯번째 장편소설은 <소년이 온다>(창비)입니다. 1980년 5월 광주 때 죽거나 겪어낸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해 5월18일부터 열흘간 벌어진 상황과 죽음,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5·18 당시 도청 상무관이 주무대입니다. 이곳에서 시신 관리를 돕는 중학교 3학년 소년 동호,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는 동호의 친구 정대, 동생 뒷바라지를 하다 그 봄 행방불명된 정대의 누나 정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5·18 때 붙잡혀 끔찍한 고문의 트라우마로 삶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며 고통과 무력감에 시달리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한강은 “이 소설을 피해갈 수 없었”고,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고 말합니다. 작가는 고증과 취재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한강은 책 말미에 “이 책을 쓰면서 도움을 받은 자료들 가운데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풀빛 1990)과 <광주, 여성>(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후마니타스 2012), <우리들은 정의파다>(감독 이혜란), <오월애>(감독 김태일), <5·18 자살자·심리부검 보고서>(연출 안주식)에 각별히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밀한 기억들을 나눠주시고 오래 격려해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합니다. 5월 광주는 지금도 갖은 핍박에 시달립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의 수난도 계속됩니다. 전두환은 발포 명령을 부인하며 광주영령을 모독합니다.

한강은 2016년 맨부커상을 받았습니다. ‘세계적 명성’의 상 수상을 두고 미디어와 여론은 ‘국민 작가’로 등극시키는 모양새입니다. ‘쾌거’에 ‘문학한류’ ‘K문학’이라는 조어도 나왔습니다. 5월 광주 희생자들의 내면과 고통을 깊이 응시하며 국가 폭력을 고발한 작가라는 점도 부각할까요? 5·18광주민주화운동 36주년(2016년)을 맞는 오늘(18일) 5월광주를 아프게, 힘겹게 써내려간 작가 한강을 조명하고 싶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창비의 허락을 얻어 한강이 소설에서 묘사한 5월 광주의 참상·고통을 발췌해 전합니다. 현장 사진은 5·18 기념재단이 홈페이지의 5·18 기록관(▶)에서 가져왔습니다.

■1장 어린 새

“오늘 적십자병원에서 오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몇이나 될까. 네가 아침에 물었을 때 진수 형은 짧게 대답했다. 한 서른명 될 거다. 저 무거운 노래의 후렴이 다시 까마득한 탑처럼 쌓아올려졌다가 쓸려내려오는 동안, 서른개의 관들이 차례로 트럭에서 내려질 것이다. 아침에 네가 형들과 함께 상무관에서 분수대 앞까지 날라놓은 스물여덟개의 관들 옆에 나란히 놓일 것이다.”(8쪽)

상무관에 안치된 수많은 시신들, 그들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꽃잎처럼 스러져갔다. /출처 5·18 기록관

상무관에 안치된 수많은 시신들, 그들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꽃잎처럼 스러져갔다. /출처 5·18 기록관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17쪽)

■2장 검은 숨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57~58쪽)

젊은 부부가 금남로 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원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출처 5·18 기록관

젊은 부부가 금남로 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원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출처 5·18 기록관

리어카에 실려 행렬을 앞서 가던, 역전에서 총을 맞았다던 두 아저씨의 몸은 어떻게 됐을까. 끄덕끄덕 허공에서 흔들리던 벗은 발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 모습을 본 순간 너는 소스라쳤는데. 세차게 눈꺼풀이 깜박이고 속눈썹이 떨렸는데. 그때 난 네 손을 붙잡았는데.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넋 나간 듯 중얼거리는 너를 행렬의 앞으로, 더 앞으로 잡아끌었는데.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너를 힘껏 끌고 나아가며 난 노래했는데.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는데. 그들이 내 옆구리에 뜨거운 불덩이 같은 탄환을 박아넣기 전에. 저 얼굴들을 하얀 페인트로 지워버리기 전에.(59쪽)

■3장 일곱개의 뺨

전두환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두환 /경향신문 자료사진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창 아래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아 그녀는 손톱들의 거스러미를 뜯어낸다. 실내가 따뜻하지만 목도리를 내릴 수는 없다. 문신 같은 뺨의 상처가 라디에이터의 열기에 달아오른다.

보안사 군복을 입은 담당자가 출판사의 이름을 호명해 그녀는 창구로 다가선다. 어제 박 양이 가져온 가제본을 제출한 뒤, 이주 전에 제출해 심사가 끝난 가제본을 가지고 가겠다고 말한다.

기다리십시오.

■4장 쇠와 피

그 순서가 끝나면 그들은 침착하게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소총의 개머리판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본능적으로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그들은 등과 허리를 밟았습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내가 몸을 뒤집으면 군화로 정강이를 짓이겼습니다.(106쪽)

금남로에 운집한 시위군중을 향하여 최루탄을 터뜨리며 뒤쫓고 있는 계엄군들, 그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달려든 이민족의 군인들보다도 더 잔혹했다. /출처 5·18 기록관

금남로에 운집한 시위군중을 향하여 최루탄을 터뜨리며 뒤쫓고 있는 계엄군들, 그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달려든 이민족의 군인들보다도 더 잔혹했다. /출처 5·18 기록관

도청 앞 스피커에서 연주곡으로 흘러나온 애국가에 맞춰 군인들이 발포한 건 오후 한시경이었습니다. 시위 대열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달아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산산조각나 흩어졌습니다. 총소리는 광장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높은 건물마다 저격수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옆에서,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는 사람들을 버려둔 채 나는 계속 달렸습니다. 광장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됐을 때 멈췄습니다. 허파가 터질 듯 숨이 찼습니다. 땀과 눈물에 얼굴이 흠뻑 젖은 채 셔터가 내려진 상점 앞 계단에 주저앉았습니다. 나보다 강한 몇몇 사람이 다시 거리 가운데 모여, 예비군 훈련소에 가서 총을 가져오자고 의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있으면 다 죽어요. 우릴 다 쏴 죽일 거란 말이오. 우리 동네는 집에까지 공수들이 들어왔소. 무서워서 나는 머리맡에 식칼을 두고 잤소. 말이 됩니까, 저쪽은 총이 있는데. 수백발을 저렇게 백주 대낮에 쏘는데!(114~115쪽)

M16자동소총을 휴대한 공수부대는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마저 뒤쫓아가서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출처 5·18 기록관

M16자동소총을 휴대한 공수부대는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마저 뒤쫓아가서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출처 5·18 기록관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117~118쪽)

■5장 밤의 눈동자

대통령이 돌연히 죽은 시월 당신은 자문했다. 이제 폭력의 정점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들은 옷을 벗어들고 울부짖는 여공들을 끌고 가지 못하는가? 넘어진 여자애의 배를 밟아 창자를 터뜨리지 못하는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는 젊은 소장이 장갑차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곧이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는 것을 당신은 신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조용히 소름이 끼쳤다.(158쪽)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170쪽)

■6장 꽃 핀 쪽으로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렇게 만나 싸웠다이. 헤어질 적마다 엄마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쓸고, 눈을 들여다봄스로 다시 보자고 약속을 했다이. 없는 살림에 추렴을 해서 전세 버스를 맞추고 서울 집회에도 올라갔다이. 한번은 모진 놈들이 우리 버스 안에 사과탄을 던져넣어서 한 엄마가 숨을 못 쉬고 쓰러졌어야. 모두 다 잡혀 전경차에 실려갔을 적에, 그놈들은 한적한 국도변에 한사람 떨어뜨려놓고, 한참 가다 또 한사람 떨어뜨려놓고…… 그렇게 우리를 다 흩어놨어야. 나는 지리도 모르는 갓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이. 다시 우리들이 모여서 서로 등을 문지를 때까지. 추위에 퍼레진 입술들을 들여다볼 때까지.(190쪽)

1980년5월 광주에서 군인들의 총격에 사망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있는 소년의 모습./출처 5·18 기록관

1980년5월 광주에서 군인들의 총격에 사망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있는 소년의 모습./출처 5·18 기록관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한강의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는 작가의 이야기, 소설 이야기입니다. 13세 때 계엄군의 학살 장면을 담은 사진첩에서 5월광주를 목도합니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광주항쟁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놓았다고 회고합니다. 다음은 에필로그 발췌입니다.

소설가 한강 /정지윤 기자

소설가 한강 /정지윤 기자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 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을 피해 나는 달아났다. 숨이 턱에 받쳐 뜀박질이 느려졌다. 그들 중 하나가 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순간 군인이 총검으로 내 가슴을, 정확히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 새벽 두시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명치를 짚었다. 오분 가까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덜덜 턱이 떨렸다. 울고 있었던 줄도 몰랐는데, 얼굴을 문지르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203쪽)

처음 혼자서 망월동을 찾았던 스무살의 겨울을 기억한다. 묘지 언덕의 무덤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그를 찾고 있었다. 그때까지 성은 몰랐다. 어른들의 대화에서 엿들은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막내삼촌의 이름과 비슷해 얼른 외워졌던, 만 열다섯살의 동호.(205쪽)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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