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기·가족경영 흔한 택시업계…기사 노동조건 개선이 힘든 이유

2020.03.02 22:23 입력 2020.03.02 23:17 수정

서울 택시업체 전수조사

[나는 한국의 택시운전사]쪼개기·가족경영 흔한 택시업계…기사 노동조건 개선이 힘든 이유 이미지 크게 보기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주택가 안으로 들어서자 줄지어 선 꽃담황토색 법인택시가 눈에 들어왔다.

지상 4층 규모 가건물 형태의 법인택시 회사 차고지 사무실 창문엔 ‘○○교통 배차실’ ‘××운수 배차실’이라는 종이가 붙었다. 4개 택시회사가 이 차고지를 함께 사용했다. 차고지는 택시회사들이 차량을 관리·보관하는 장소다.

택시기사들은 이곳에서 차량을 인수·반납하며 출퇴근한다.

이날 강서·양천·금천구의 차고지 네 군데를 둘러봤다. 양천구 신월동 차고지는 4개 택시회사가, 강서구 내발산동 차고지에는 5개, 금천구 독산동 차고지는 3개 회사가 주소지를 뒀다. 차고지 건물마다 ‘기사님 대모집’이라는 광고판과 함께 여러 개의 택시회사 이름이 함께 나붙었다. 3개구 차고지 택시회사는 16개다. 모두 ㄱ씨(79)가 대표이사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서울 254개 택시업체의 등기부등본 등 관련 자료를 분석했다. 사실상 같은 회사들이 여러 개로 쪼개져 운영 중인 것을 확인했다. 한 사람이 복수의 업체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렸고, 한 차고지를 함께 사용했다. 여러 회사에서 자녀가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설립자 가족이 임직원을 맡은 회사가 대다수다. ‘가족경영’이 두드러진 업종이다.

■ 경영 키워드는 ‘쪼개기’·‘가족경영’

세금·자동차보험 비용 줄이려
같은 회사를 여러 개로 쪼개 운영
기사들의 단결력·협상력은 약화

ㄱ씨는 16개 회사에 가족 등과 함께 (공동)대표이사로 등기된 상태였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많은 택시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송파·강동구를 기반으로 한 ㄴ씨(47)가 7개, 강동·송파·노원구 등에서 활동하는 ㄷ씨(57)가 4개 회사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택시 가맹사업을 벌이고 있는 카카오모빌리티의 자회사가 직접 인수해 운영하는 택시회사도 9개였다.

택시회사 대표나 이사 등으로 등기된 이들이 2개 이상 회사에 중복된 경우도 101개 회사 등기부등본에서 발견했다. 대표나 이사진 이름이 중복되고 차고지 주소도 같은 택시회사가 60개에 달했다. 이런 회사들은 보통 ‘◇◇실업·◇◇교통’ 등 유사한 상호명을 단 경우가 많았다. 택시업계 한 관계자는 “택시업체가 여러 개라도 경리 담당 직원 1~2명이 모두 같이 관리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사실상 같은 회사를 여러 개로 나누어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택시업계 관계자들은 세금이나 자동차보험 비용을 절감하고, 노무관리 위험 요소를 분산하려 ‘쪼개기 경영’을 한다고 본다. 차량 보유대수가 적으면 회사 규모도 작아지니 절세 효과를 누린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보험료 할증 폭을 줄일 수 있다. 택시기사들은 1개 업체 소속으로 모일 수 없어 단결력이나 협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택시업체 대표들이 활동하는 ‘택시운송사업자조합’에서 영향력도 커진다. 1개 회사당 1표씩 행사하기 때문이다.

등기부등본 분석에서 확인한 또 다른 특징은 택시회사 대부분이 ‘가족경영’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서울의 택시회사 대부분이 자손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방식으로 유지돼왔다. 수십년 된 택시업체가 많은 것도 이런 특징 때문이다. 등기부등본 설립일자를 기준으로 하면, 서울의 택시회사 254개 중 절반이 넘는 163개가 1979년 이전 설립됐다. 대부분이 1대 설립자에 이어 자손들이 대표 등 회사 임원을 맡아 운영 중이었다. 회사를 내놓았을 때는 기존의 다른 택시업체 대표가 회사를 인수해 갔다.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경우가 많다보니 30대가 채 되지 않는 경영진의 이름을 등기부등본에서 발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택시회사 대표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ㄹ교통의 ㅁ씨(28)였다. ㅁ씨 가족이 운영하는 택시업체는 모두 3개였다.

대표 또는 임원(이사 등)으로 등기부등본에 이름을 올린 30세(1990년생) 이하는 모두 9명이었다. 공동대표로 등기된 30~35세는 5개 업체 4명으로 나타났다.

■ ‘죄수의 딜레마’ 빠진 택시업계

‘가족경영’과 ‘쪼개기 경영’은 별다른 혁신 없이 경영이 가능한 택시업계 특성 때문에 가능하다. 마케팅 전략과 고객 만족도 향상,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 같은 ‘기본’이 없어도 사납금 등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여러 택시회사들은 혁신과 기본으로 수익을 창출하기보다는, 택시면허를 늘려 자산을 불리거나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ㄱ씨의 사례에서 택시업계 ‘큰손’들의 경영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다. ㄱ씨가 소유한 16개 회사의 택시를 모두 합치면 1000대가 넘는다. 택시가 많아질수록 ‘프리미엄’을 포함한 자산도 늘어난다. ㄱ씨는 경기 지역에도 4개 택시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가스충전소 업체나 자동차 공업사, 호텔 등도 운영 중이다.

전자공시시스템에서 확인한 2018년 ㄱ씨의 가스충전소 운영업체 감사보고서를 보면, ㄱ씨 소유의 택시회사 등 특수관계자와의 거래 매출액이 약 65억원으로 매출액 전체의 75%가량을 차지했다. 여러 택시회사 대표들이 ㄱ씨처럼 가스충전소를 운영한다. 택시회사는 지자체로부터 연료비를 지원받는다. 자신이 소유한 택시업체와 가스충전소가 거래하면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다. ㄱ씨 측은 여러 개 택시회사를 소유한 배경을 묻는 질문에 “그럼 삼성은 왜 여러 개 회사를 가지고 있냐”며 답변을 거부했다.

‘뜨내기 장사’ 하는 업계 특성상
서비스·노동조건 혁신은 뒷전
면허 늘려 자산 불리기에 집중

소비자인 승객들은 특정 업체 택시를 선택해 이용하지 않는다. 길가에서 잡아타거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택시를 불러 타는 일반적인 이용 방식은 택시회사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알릴 필요를 없애버린다. 택시영업은 그동안 ‘단골 장사’가 아닌 ‘뜨내기장사’를 해왔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택시기사 노동조건도 개선할 필요가 없어진다. 모든 회사가 함께 택시기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노동조건 개선은 택시회사 입장에선 비용만 늘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택시업계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능력도 부족하다. 한 택시업계 관계자는 “택시 사업을 좀 선진적으로 운영한다는 곳이 ‘엑셀’ 같은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수준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회사가 매출관리 등을 노트에 손으로 적어서 한다”고 말했다. 그는 “‘컴퓨터 없이도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경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택시기사들의 사납금이라는 확고한 수익 모델을 갖고 외부의 다른 경쟁 상대 없이 영업을 이어온 것”이라고 했다.

김성한 민주택시노동조합 사무총장은 “택시회사가 난립하는 현상은 과거 차량을 빌려주고 사용료를 받던 ‘지입차’ 제도에서 유래된 것인데, 택시회사들도 통합하고 규모를 줄여나가면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회사나 면허만 인수해 확장하는 경영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방식은) 택시기사들의 처우도 악화한다”고 말했다.

소수 업체들이 변화 시도해도
전체 산업 양상 바꾸긴 힘들어
서로 눈치 보는 ‘죄수의 딜레마’

한두 업체가 변화를 시도해도 전체 택시산업의 양상을 바꾸긴 힘든 게 문제다.

안기정 교통시스템연구실 연구위원은 “택시업체들이 여러 개로 나눠 운영해온 회사를 하나로 합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택시기사 처우를 개선해 서비스 질을 향상하려 해도 전체적인 택시 수익을 높일 수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서로 눈치만 보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택시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운송수입금을 늘리기도 힘들다. 이양덕 전국택시운송사업자조합연합회 상무는 “수익 자체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서비스 질을 높이고 택시기사 처우를 개선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며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간 서비스가 계속해서 나아져온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조그만 택시회사가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긴 어려운 것도 현실인데, 과거 같은 방식보다는 택시를 브랜드화하고 플랫폼 사업과도 연결해 새로운 경영 방식을 업체들이 논의하는 중”이라고 했다.

■ 목차

1. 나는 ‘법인택시’ 기사입니다

2. 2003~2020, 택시노동자 추적조사

3. 서울 택시업체 전수조사

4. 택시의 과거 그리고 미래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