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의 힘

2013.11.22 20:50 입력 2013.11.22 22:11 수정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새 학기 교실에 지난해의 아이들이 가고 / 지난해만 한 아이들이 새로 들어왔다 // 떠들고 웃고 반짝인다 // 이 반짝임은 지난해에 그랬고 그 지난해도 그랬고 / 그 전해 그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 이 교실은 해마다 / 요만한 애들이 앉았다 간다 웃고 떠들고 침묵하고 / 흘러간다 // 교실은 아이들이 흐르는 강이다 // 나는 강의 한 굽이에 서서 /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이성선 ‘강물’)

[사유와 성찰]낭독의 힘

예전에는 대학 강의실에 수업하러 들어가면 늘 떠들썩했다. 강의를 시작하려 해도 시끄러운 소리가 그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강의에 임하기 위한 침묵이 아니다. 저마다 스마트폰에 열중하느라고 말이 없는 것이다. 친한 친구들끼리 앉아도 그런 경우가 많다. 강의실뿐 아니라 캠퍼스 공간 전체가 예전보다 훨씬 조용해진 듯하다. 집회가 없어진 지 오래고, 친구를 멀리서 크게 부르는 소리도 듣기 어렵다. 전화 통화조차 잘 하지 않고 문자를 애용한다.

동네에서도 아이들의 함성이 점점 사라진다. 바깥에서 어울려 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성장 환경 탓인지,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지는 듯하다.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어떤 질문을 하면, 대답이 잘 들리지 않아서 크게 말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리고 학생들은 강의를 듣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도 곧바로 손을 들고 묻는 대신, 끝나고 개인적으로 다가와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공유하면 좋은 내용인데도 말이다. 자기의 음성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부담되는 모양이다.

나는 학생들이 편안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려 애쓴다. 자기의 발언이 선생은 물론 동료들에게도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 생각과 느낌들이 모아져서 풍성한 언어의 공간이 형성될 수 있음을 경험하면, 말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 하지만 처음 말문 여는 것을 망설이고 어색해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럴 경우 먼저 소그룹으로 나눠 간단하게 토론하고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면 낯가림이 서서히 누그러진다. 친밀하고 안전한 관계를 통해 경계심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발성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낭독이다.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던 말에 암시되어 있듯이, 근대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글을 언제나 소리를 내서 읽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공부에서도 경전의 음독이 필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보급되고 그와 함께 개인주의가 정착하면서 묵독이 대세가 되었다. 그것은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음독이 병행되어야 한다.

나는 강의를 할 때 가끔 수강생들이 돌아가면서 교재를 소리 내어 읽도록 한다. 여러 빛깔의 음성들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학습 공동체를 실감할 수 있다. 시를 낭송시키는 경우도 있다. 시라는 것이 워낙 눈으로 빠르게 훑어 내릴 것이 아니라, 입으로 천천히 읽으면서 그 내재율을 음미해야 한다. 그를 통해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다. 그리고 낭독에 나선 이는 그 엄숙한 시간을 주재하는 가운데 격조 높은 자아를 만나게 된다.

소리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통사회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만큼의 거리가 어떤 마을이나 도시의 범위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청각 신호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합창을 할 때 가슴이 넓어지는 까닭도 그러하리라. 똑같은 리듬과 호흡으로 몰입하면서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낭독도 비슷한 효과를 자아낸다. 하나의 텍스트에 참석자들의 눈과 귀가 온전히 모아지는 속에서 모두가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종의 공적인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보다 넓고 높은 세계로 나가는 기쁨이 거기에 있다.

디지털 통신이 폭증하는 가운데 아날로그적 관계는 점점 적막해지고 있다. 그 침묵은 그냥 공허함일 뿐이다. 마음을 여백으로 비우면서 존재를 교감하는 고요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한 해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즈음, 가족이나 지인들끼리 둘러앉아 촛불 하나 켜놓고 낭독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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