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내일 만들기

모호한 정체성 풍기는 ‘필명’

2019.12.19 20:50 입력 2019.12.19 20:57 수정

<동주> <그것만이 내세상> 등에서 한국영화의 기대주로 떠오른 배우, 박정민은 ‘글 좀 쓰는 배우’로 알려져 있다. 2013년부터 칼럼을 연재하는데, ‘말로 기쁘게 한다’라는 의미로 ‘언희(言喜)’라는 필명을 쓴다. 최근 3년 만에 자신의 에세이 <쓸 만한 인간> 개정증보판을 출간하며 오디오북으로도 직접 읽어주고 있다. 배우 박정민의 독특한 연기파 캐릭터가 살아있는 듯 묵직하게 자신의 글을 읽어주면, 독자들의 상상력은 ‘언희’와 함께 더욱 풍요로워진다.

[문화로 내일 만들기]모호한 정체성 풍기는 ‘필명’

1996년 <용비불패>로 무협만화의 새로운 전기를 연 문정후 작가는 평생 함께 작업한 류기운 스토리작가의 건강 문제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네이버웹툰 <고수>를 2018년 12월 휴재했었다. 독자들의 팬덤은 다른 웹툰에서 볼 수 없었던 진중함으로 그 시간을 견뎠고, 2019년 12월18일부터 연재가 재개되었다. 문정후 작가의 본명은 문호주이다. 무협만화 작가의 내공으로는 문정후라는 이름이 어쩐지 더 믿음직하다.

국내 최장기 방송드라마 <전원일기>로 여전히 농촌마을 김회장 캐릭터를 갖고 있는 배우 최불암은 14대 통일국민당 국회의원을 하면서 본명 최영한으로 의정활동을 했다. 주로 방송과 언론정책을 심의하며 민의를 모으던 그였지만, 여전히 농촌의 민원이 ‘최불암’에게 쏟아졌다고 한다. 예명은 그렇게 더 진짜 같은 가짜를 믿게 한다.

독고탁으로 야구만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만화가 이상무는 본명이 박노철이다. 군대 제대 후 뛰어난 작화력과 연출력을 인정받으며 만화방 작가로 데뷔하던 때 출판사에서 필명을 요구하니, 군대에서 가장 익숙하게 썼던 용어 ‘이상무!’를 제안했다고 한다. 알고 나면 그럴듯하지만, 우리는 이상무 작가의 독고탁으로 한 시대를 살았다.

순정만화의 대부인 만화가 김동화도 본명은 김종철이다. 순정만화가로 한 시대의 작품과 작가를 만들어낸 장르의 모험가로서는 예명의 분위기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걸그룹 미쓰에이의 아이돌에서 <건축학개론>으로 배우에 데뷔한 수지는 최근 드라마 <배가본드>와 영화 <백두산>으로 주연 여배우의 위상을 만들어가는데, 본명이 배수지이다.

보이그룹 H.O.T.의 강타는 본명이 안칠현이다. 아이돌의 예명은 나름대로 캐릭터에 맞게 재개념화된다. 그러다보니 요즘 아이돌 이름이 거의 비슷해지는 느낌이다.

영화 <제5원소>의 디자인을 맡은 프랑스 만화가 뫼비위스(Moebius)도 본명이 장 지로(Jean Giraud)인데, 평생 만화작품을 통해 남겨진 필명 뫼비위스가 프랑스만화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고 있다. <탱탱(TinTin)>의 원작자인 에르제도 벨기에 출신 만화가로 본명이 조르주 프로스페 러미인데, 유럽인들에게 그는 땡땡의 아버지 에르제로 기억되고 있다. 땡땡은 프랑스를 너머 유럽인 모두의 지적 자존심이며, 에르제는 그러한 역사로 평가된다.

최근 국내 웹툰작가들이 거의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신인작가일수록 작품마다 다른 필명을 쓰기도 한다. 한 명의 작가가 무려 3~4개의 필명을 쓰며 활동한다. 댓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느낌이라 안타깝다.

본명으로 활동한 이두호, 허영만, 이현세, 김수정 등의 만화가 갖는 시대적 느낌이 이상무, 김동화, 문정후처럼 필명에서도 느껴지는 그런 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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