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2020.07.27 03:00 입력 2020.07.27 03:04 수정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부터 찾는다. 간밤에 페이스북에 누가 무슨 글을 올렸는지, 내 글에 달린 댓글은 몇 개나 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나를 보는 것인지 남을 보는 것인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인지 남에게 비친 나를 보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21세기는 자기 자신의 세계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가득하다. 온라인의 바다를 30분만 훑어봐도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주절대며, 자아의 향연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소통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책읽는수요일 펴냄)의 저자인 사라 베이크웰의 세태진단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0여년 동안 페이스북에 푹 빠져 지냈다. 덕분에 몇 권의 책을 냈고, 강의와 방송 출연 제안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어 좋았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페이스북은 내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런 페이스북을 보름째 쉬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몇몇 사건을 목도하면서다. 그중에서도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그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원인과 과정, 결행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잘못을 인정한 것인가, 회피한 것인가? 죽음으로 책임진 것인가, 무책임한 것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한편, 죽음의 맞은편에 구체적이고도 선명한 고통이 있다. 박 시장의 죽음이 안타까운 일이라면, 성추행 피해자의 삶은 감당하기 힘들지만, 피할 수도 없는 실체적 고통이다. 안타까움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누가 과연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죽음을 알 것이며, 누가 피해자의 고통을 제대로 보듬을 수 있단 말인가.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자는 게 아니다. 다만 알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떠들거나 근거 없는 소문에 휘둘리지 말자는 얘기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과 나누는 대화여야 한다. 몇 마디 글로 남을 속이고 현혹하기는 쉽지만, 그 상대가 자기 자신이라면 거짓은 발붙이기 힘들다. 그러한 글쓰기의 전범이 몽테뉴였다. 몽테뉴의 글쓰기는 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몽테뉴의 관심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따위의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에 있었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였던 것이다. 그런 사유의 흐름을 엮어놓은 것이 바로 ‘에세(Essais)’다.

몽테뉴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자신의 성에 틀어박혀서 책읽기와 글쓰기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 역시 욕망을 온전히 제어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의 서재 기둥과 지붕에 경구들을 붙여놓고 수시로 음미하면서 가슴의 불구덩이를 다스렸다. 그 가운데 ‘크세주(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문장이 있다. 박홍규 교수는 ‘크세주’의 의미를 “심오한 사색의 결론이 아니라 회의주의적 사색의 이정표”(<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에서)라고 설명한다. 회의주의는 허무주의가 아니며 자유로운 정신이다.

“가벼운 슬픔은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게 하고, 깊은 슬픔은 멍하니 정신을 잃게 한다.” 몽테뉴의 <수상록 Essais>(동서문화사 펴냄) 중 ‘슬픔에 대하여’에 나오는 세네카의 말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쓸데없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그저 멍하니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제 조용히 몽테뉴의 사유를 좇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나는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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