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견디는 세상

2020.08.03 03:00 입력 2020.08.03 03:02 수정

전화로 억울함을 직접 말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을 주로 지원하고 있기에, 전화는 별 부담감 없이 받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평소와 다른 전화를 받는다. 여느 전화 통화와 거의 비슷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뭔가 매캐한 기운이 전해지는 전화들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한 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아빠랑 떨어져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묻는 남성이 있었다. 다 큰 어른이라서 아버지와 살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걸 왜 법률사무소에 물어보나 싶다가 목소리 끝에 왠지 힘이 없기에 물어보았다. “선생님, 혹시 복지카드 가지고 계시나요?”라고.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네’라고 했다. 정신이 확 들었다. 이 발달장애인이 어떤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을까. 길게 통화하기가 어렵다기에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눠도 될까요” 묻고 허락을 받아냈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당사자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지원기관에 연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학대 상황에 놓여 있던 그 발달장애인이 구출되고 가해자인 친부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화기 속 그 발달장애인이 견뎌왔던 세상은 지옥이었던 것이다.

“뭐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애가 장애인이면 부모는 죽을 때까지 친권이랑 부양의무가 있나요?”

얼마 전, 얼굴 모르는 여성의 이 날카로운 목소리에 잠깐 고민을 했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친권은 미성년 자녀가 성인이 되면 소멸하고, 민법상 직계혈족 간에는 서로 부양의무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서둘러 끊을까’ 하는 생각이 1초간 스쳤다가, 숨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어머니, 장애 아이를 키우고 있으신가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 격앙된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그렇게 30분을 묻고 귀 기울였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이 여성은 장애아를 낳았다며 모진 학대를 감내하다 이혼당했고, 아이는 친부가 데려갔다. 친부가 이 아동을 학대하여 형사처벌을 받으면서 아동은 아무런 준비가 없던 친모에게 갑자기 돌려보내졌다. 친모는 양육비 한 푼 받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기 위해 사회가 시키는 어떠한 궂은일도 감내해야 했다. 이 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로부터 거절당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살해하고 자신도 따라 죽으려고 마음먹었다. 둘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주변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치솟는 화를 풀어낼 곳이 필요해서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얼굴도 모르는 우리는 엉엉 울었다. ‘누구나 태어난 이유가 있다’고 쉽게 말해주기 어려운 인생이 적지 않음을 또 절감한다. 급하게 이 여성과 장애아동에게 연결할 수 있는 모든 사회복지 전달체계를 끌어왔다. 며칠 후 통화한 이 여성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웠다. 그는 “이제는 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견디는 것을 넘어서 숨이 좀 쉬어지면, 이렇게까지 만든 원인을 법적으로 함께 대응해보자고 약속했다.

언택트(비대면) 시대는, 누군가와 대면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을 더 가혹하게 만들고 있다. 예전처럼 살 수 없는 뉴노멀 시대이니 알아서 적응하라지만, 하루하루 생존의 기로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적응’만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대한민국 대전환’이라는 114조원의 ‘뉴딜’은 그저 이 악물고 삶을 견딜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당연한 권리를 ‘배려’와 ‘시혜’에 가두는 정책은 결국 이 사람들에 대한 포기 선언이다.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사람들만 선택적으로 ‘도와주는’ 지금까지의 정책 패러다임이 이번 ‘뉴딜’로 인해 완전히 전환되기를 기대한다. 이미 충분히 고립되어 더 이상 ‘언택트’를 감내할 수 없는 이들도 한 명 한 명 존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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