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는 ‘에너지 절약’ 덧씌우기

2007.06.11 17:58

머리싸움, 말싸움, 주먹다짐 등 사용하는 수단에 따라 싸움도 가지가지이지만 우리 정치판 싸움 가운데 ‘이념 덧씌우기’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색깔론’으로 불려온 이 싸움법은 냉전의 망령을 되살려내 국민을 편가름하는 해악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탁월한 효과로 오랫동안 불패신화를 자랑해왔다. 한번 상대를 이념으로 덧씌워버리면 사안의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국민들은 강한 최면에 걸린 듯 순식간에 상대에게 등을 돌렸다. 덧씌워진 이념은 낙인(烙印)처럼 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다.

경제정책에도 이념 덧씌우기 비슷한 것이 있다. ‘이념’이 너무 거창하다면 명분이나 슬로건이라 해도 좋다. 처음부터 백해무익하지는 않고 어느 수준까지는 긍정적인 효용이 있다는 점에서 정치판의 그것과는 차별적이다. 하지만 도(度)를 넘어서 지나치면 사안의 합리적인 논의를 해치고 반론을 무력화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판의 이념 덧씌우기와 닮은 꼴이다.

-‘稅인하=소비증가’ 억지비약-

얼마전 재정경제부 당국자가 유류세 인하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에너지 절약이 중요하므로 (세금인하는) 곤란하다”고 답했다. 유류세 인하 요구는 유류에 붙는 세금이 과다하니 세부담을 낮추자는 것이어서 에너지 절약과는 별개로 논의할 사안이다. 그런데도 유류세 인하 요구에 ‘에너지 절약’이라는 이념 아닌 이념을 덧씌워 마치 ‘에너지 절약을 하지 말자’거나 ‘기름을 펑펑 써도 좋다’는 주장인 양 본질을 호도하고 나선 것이다. 굳이 국책연구소 보고서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류의 가격 탄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가격등락이 소비증감에 별 영향이 없다는 사실을 정부가 모를 리 없다.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세금인하=소비증가=국제수지 악화’라는 논리비약을 내세워 유류세 인하 요구를 ‘나라 걱정은 않고 제 주머니만 생각하는’ 몰상식한 주장처럼 몰아가는 꼴이다.

유류세 인하 요구는 유류 가격이 우리 국민의 소득수준을 감안할 때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과 소비자 가격의 약 60%가 세금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과중한 세금부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유류세와 관련한 정부의 몰염치한 자세에 있다.

애초 휘발유 등 유류에 붙게 된 세금은 특별소비세 개념이었다.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세금을 통한 소비억제의 당위성에 반론이 있을 리 없었다. 간접세의 속성상 소비자가 세부담을 실감하기도 어려워 걷는 입장에서는 매력 만점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유류가 무슨 사치성 소비재냐’는 반론이 커지자 교통시설 재원 마련이라는 징수 목적에 걸맞은 ‘교통세’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거둔 세금이 100조원이 넘었다. 하나의 목적세로 징수한 세금이 100조원에 이른다면 교통시설 확충 아니라 제아무리 거대한 징세 목적이라도 달성되고 남았을 터다. 100조원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20개, 인천공항을 25개 건설하도고 남을 만큼의 돈이다. 지난해에는 ‘교통에너지환경세’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과세시한을 두번째로 연장했다. ‘교통시설 재원 마련’에다 ‘에너지 절약’과 ‘환경보호’ 명분까지 추가했으니 애초 10년만 거두기로 탄생한 목적세가 불멸의 토대를 갖춘 셈이다.

정부의 이런 몰염치의 본질은 세수(稅收)에 있다. 교통세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주행세·교육세·부가세 등을 포함해 국세의 약 19%가 유류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세수 현실에 있는 것이다. 지난 한해에만 26조원이 걷힐 정도로 유류세의 덩치가 커져버렸으니 대체할 세수가 막막해 아예 손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낡은 세입구조부터 바꿔야-

그렇다고 정부가 “세수 비중이 너무 커 손댈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없는 이유는 유류세로 인한 소비자의 고통이 너무 커 그런 고백을 점잖게 들어줄 국민이 없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복지예산 등 씀씀이는 커지는데 그동안 낡은 세입구조를 개혁하지 못해 유류세처럼 만만한 세금만 붙잡고 늘어지게 된 직무유기도 실토해야 한다. 그러니 애꿎은 에너지 절약만 내세워 소비자의 요구를 옥죄려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에너지 절약으로 말하자면 국민도 할 말이 많다. 관용차부터 경차로 바꾸지 않는 정부가 주말 나들이나 먹고살기 위해 차 몰고 나서는 서민에게까지 에너지 절약의 고통 분담을 말할 자격은 없지 않은가.

〈서배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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