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에 막힌 간만의 남북대화… 국제적 기준도 경우에 따라 달랐다

2013.06.12 22:44

2003년 북핵 논의 위해 북 리근 부국장·미 켈리 차관보 회담

남북당국회담을 무산시킨 양측 수석대표의 격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는 북한이 당 우위 체제이고 내각에 남측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부처가 없다는 점이 자리 잡고 있다. 양측이 과거 장관급 회담에서 남측 통일부 장관과 북측 내각 책임참사가 만나는 방식으로 논쟁을 우회해온 것은 이 때문이다. 전직 통일부 고위 관계자는 “장관급 회담의 격에 모호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가 이번 기회에 제기해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단 한 차례 실무접촉으로 그걸 해결하려다 결과적으로 회담을 시작조차 못한 것은 별로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 김양건과 류길재는 같은 급인가

정부가 실무접촉에서 북한에 수석대표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예를 든 인물은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비서(75) 또는 그에 준하는 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통일부 당국자는 12일 밝혔다. 통전부장은 지난 21차례의 장관급 회담에 북측 대표로 나온 적이 없다. 북한 스스로 통전부장을 부총리급으로 여긴다. 통일부도 남북회담 자료 웹사이트에 북한 통전부장을 부총리급으로 소개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때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과 김용순 대남담당비서 겸 통전부장이 만났다. 1971년 이래의 남북회담 역사에 비춰보면 류길재 통일부 장관(54)이 김양건 부장과 같은 급은 아니었던 셈이다. 굳이 김양건 부장을 공식 회담 석상에 불러내겠다면 통일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 강지영은 정부 부처 ‘국장급’이다?

북한이 이번 회담의 수석대표로 제시한 상급(相級·장관급) 당국자는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57)이다. 조평통은 통전부 산하 대남기구다. 통일부 당국자는 12일 한 언론의 보도를 인용하며 강지영 국장을 남측의 ‘차관보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소개했다.

2005년 차관급 회담에 이봉조 당시 통일부 차관의 상대로 김만길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 나왔고, 2007년 장관급 회담 실무접촉에 이관세 당시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차관급)의 상대로 맹경일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 나온 적이 있다. 북한이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장관급으로 내세울 근거는 있는 셈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국장을 지낸 김창수 한반도평화포럼 기획운영위원장은 “청와대가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우리 정부 부처의 국장급으로 착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국장급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강 국장은 남북당국회담 참가 경력은 거의 없고, 민간부문에서 주로 일해왔다. 이 점이 그의 ‘급(級)’과 상관없이 북한이 이번 회담을 홀대한다는 인상을 주는 측면은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언급했다. 북한에 ‘현상 변경’을 요구한 것이다. 통일부 장관의 상대는 통전부장급이어야 한다는 점이 이번에 드러났다.

■ 국제적 기준도 사정에 따라 달랐다

정부는 남북관계의 관행 대신 외교무대에서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고 있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11일 “북한이 그간 EU(유럽연합) 국가들과 대화를 개최했을 때 상대국의 격과 급을 맞추어 해온 관행이 있다”며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의 부상-상대국 국장, 북한의 국장-상대국 과장과의 대화 때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화를 거부했던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예도 있다. 6자회담이 시작되기 전인 2003년 4월 북한 핵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외무성 미국국 리근 부국장과 미국 국무부 제임스 켈리 동아·태 차관보가 회담을 한 적이 있다. 정부 관계자는 “당시에 미국이 북한에 격을 따졌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1992년 1월 뉴욕에서 열린 북·미 간 고위급 회담에는 북한 노동당 김용순 국제부장 및 당 비서와 미 국무부 아널드 캔터 정무차관이 참석했다. 이때도 격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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