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있는 군인’ 평가 남재준, 정치 중립 다짐 스스로 파기

2013.06.25 22:27

4성 장군 출신 국정원장… 정권·조직 보위를 우선시

과거 노 전 대통령과 충돌

남재준 국가정보원장(69)이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남 원장은 지난 24일 ‘2급 비밀’로 돼 있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일반 문서’로 재분류한 뒤 이를 국회 정보위에 전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논란 와중에서 군사작전하듯 회의록 전격 공개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이런 전격 행동을 하기까지 민주주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다는 고민도,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대한 법 해석과 유불리를 떠나 중요 국정기록을 남기려는 법 취지도, 여야 합의라는 정치 과정도 보이지 않았다. 세간에선 ‘국정원 쿠데타’니 ‘회의록 폭탄’이란 비유도 나왔다.

4성 장군 출신의 남 원장은 보수적 군심(軍心)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강단이 있는 ‘골수 군인’으로 회자됐고, 원칙과 소신을 중시해 ‘생도 3학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역 시절 부하들과 회식을 하면 끝마무리로 항상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쏟아낸 일화는 유명하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때 육군 참모총장에 올랐지만, 2005년 장성 진급비리 의혹에 휘말리면서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주적 개념과 군 문민화 등을 놓고 노 전 대통령과 충돌했으며, “정체성 중립은 없다”는 소신에 따라 국방장관 입각 제의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박근혜 대선 예비후보 캠프 국방안보 특보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고,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이 됐다. 군 출신 국정원장은 12년 만이다. 그는 취임사에서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돼 있다. 여러분들도 전사로서의 각오를 가져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스로를 ‘이념전의 투사’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그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현역 군인과 학생군사학교(ROTC) 생도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제주 4·3항쟁을 “북한 지령으로 일으킨 무장폭동 내지는 반란”으로 규정하는 등 이념적 편향성을 드러냈다. “다시는 이 땅에 좌파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이들을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고도 했다.

남 원장은 지난 3월 인사청문회에서 “나도 정치 중립을 지킬 테니 정치권도 지켜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 회의록 공개로 이 같은 다짐은 ‘구두선(口頭禪)’에 그쳤다. 오히려 남 원장이 먼저 ‘정치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신의와 비밀의 원칙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정상회담 내용을 ‘독자 결정’으로 공개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행위다. 회의록을 공개한 시점은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에 국민적 공분이 커지고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시비로까지 불이 옮겨붙는 상황이었다. 남 원장이 박 대통령의 보위 역할을 자임했음을 부인하기 힘든 대목이다. ‘음지’에서 일한다는 정보기관이 ‘양지’로 나와 ‘안보 정치’ 논리로 정쟁에 개입한 꼴이다.

25일 3개월 만에 국회를 다시 찾은 남 원장은 인사청문회 때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회의록 공개가 위법 아니냐’는 등의 기자들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비공개 회의에서도 ‘청와대 개입설’ 등 쏟아지는 질문에 “답변 않겠다”는 말로 맞받았다. 회의록을 공개한 이유로는 “국정원의 명예”를 댔다.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선 국가 기밀도, 국익도 뒷전으로 미룰 수 있다는 인식인 셈이다.

‘고지식하다’는 평을 듣던 남 원장으로선 노 전 대통령의 대북 인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국정원장이다. 지금 국정원이 국정조사 등 위기에 처한 근본 원인도 소위 신념과 애국심으로 포장한 과도한 ‘안보 정치’ 논리로 국내 정치에 끼어든 의혹 때문이다.

남 원장 본인은 부인했지만, 그는 참여정부 시절 군 문민화에 반대하면서 ‘정중부의 난’(고려시대 무신 반란)을 언급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지금 상황은 군 출신 국정원장이 민주주의 정치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격이다. 그렇다면 ‘남재준의 난’은 성공했을까. 분명한 건 그가 원세훈 전 원장의 뒤를 이어 국정원 개혁이 시급하다는 점을 오히려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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