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잿빛 기억은 잊었다, 금빛 드라마가 시작됐다

2010.02.24 18:10 입력 2010.02.25 02:20 수정

시련이 키운 ‘빙속 특급’

아버지 사업실패 ‘쇼트’ 대표 탈락 좌절

‘전향’ 7개월 세번째 레이스서 인생역전

이승훈(22·한체대)에게는 두 번의 큰 고비가 있었다. 그 고비들을 넘게 만든 뚝심이 없었다면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첫 번째 고비는 리라초등학교 4학년 때 찾아왔다. 1학년 때 정규수업으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이승훈은 전국대회에서 6년 묵은 500m 1학년 한국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스케이트날에 오른쪽 눈썹이 찍히고, 앞니 두 개가 부러져도 마냥 “스케이트가 좋다”고 했다.

<b>금빛 환호</b> 이승훈이 24일 밴쿠버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한 후 기뻐하고 있다. 리치먼드 | 연합뉴스

금빛 환호 이승훈이 24일 밴쿠버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한 후 기뻐하고 있다. 리치먼드 | 연합뉴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와 함께 아버지 이수용씨(52)가 운영하던 음식점이 문을 닫았다. 부모는 새벽에 시작돼 밤에 끝나는 훈련에 아들을 바래다주기 힘들었다.

이승훈은 ‘운동을 그만두면 안 되겠느냐’는 부모의 말에 “혼자 새벽에 일어나 링크장에 가겠다”고 버텼다. “공부와 스케이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해도 “둘 다 열심히 하겠다”고 우겼다. 매일 버스를 타고 훈련하러 가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든 시켜보자’며 마음을 바꿨고, 중고차를 다시 샀다.

뚝심만큼 목표도 뚜렷했다. 이승훈은 4학년 때 일기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가 되겠다. 나를 믿는 코치 선생님과 어머니,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누나 이연재씨(24)는 “어릴 때 말썽꾸러기였고 집에선 딱 막내 스타일이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스케이트만 신으면 차분하고 성실해졌다”고 떠올렸다.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을 병행하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쇼트트랙에 전념했다. 신목고 1학년 때 국가대표에 뽑혔으니 어릴 적 목표는 1년 앞서 달성했다. 안현수(성남시청), 이호석(고양시청) 등과의 경쟁이 쉽지 않았지만 올림픽에 대한 꿈을 키웠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쇼트트랙 대표선발전에서 두 번째 시련이 닥쳤다. 첫 레이스에서 결승선을 5m 앞두고 넘어지더니 두 번째 레이스에서 실격을 당해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그때 정신적 지주인 광운대 서태윤 코치가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할 것을 권유했다. 7월에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후 이승훈은 “아무 목표 없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스피드스케이팅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변의 시선은 비관적이었다. “스피드로 간다고 되겠느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훈은 자신의 결정을 믿었고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8개월 만에 아시아인들에겐 오르지 못할 벽으로 여겨졌던 장거리에서 5000m 은메달, 1만m 금메달을 따 영웅이 됐다. 아버지 이씨는 “아들이 금메달을 따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는데, ‘결국 이렇게 되려고 그토록 힘들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누나 이씨는 “승훈이가 ‘메달을 따서 포상금을 받으면 25살 때 차를 사고 27살쯤 땅투자를 해서 부자가 돼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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