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또다른 꿈’ 상상하기

2003.01.23 18:26

존레넌의 ‘이매진’. 이 노래가 대선 기간 중 느닷없이 노무현 후보의 정치광고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쓴 웃음을 흘려야 했다. 세상에, 국경도 소유도 없는 세계의 꿈이 어떻게 민주당 것일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전 창원의 한 공장에서 노조 탄압을 견디다 못한 노동자가 제 몸을 태웠다. 이 사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노무현 당선자는 “앞으로 해고를 더 자유롭게 하겠다”고 밝혔다. 타오르는 몸뚱이에서 나오는 절규는 못 들어도 골프장 그린에서 오가는 보수층의 잡담에는 민감하다.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국정 전반에 걸쳐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컨설팅을 받을 작정이라 한다.

존 레넌의 상상은 겁탈당했다. 그 노래가 기껏 노동자가 분신하는 세상, 극성스런 미국 우익 재단의 허가를 받아 존재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단 말인가? 허구 많은 노래 중에 왜 하필 ‘이매진’인가? 왜 우리의 노래마저 앗아가려고 하는가? 왜 우리가 노래 속에나 담아놓은 꿈마저 훔쳐가려 하는가?

이번 분신사건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억압이 어디서 행해지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 억압은 결코 주제화되지 않는다. 보도가 되어도 이 불행한 사태의 구조적 원인은 지적되지 않는다. 이 억압이 실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독특한 인권철학의 발로라는 것을 아는가? 청와대에 앉은 그는 구속을 남발하면 국제적 비난을 받으므로 “민사 대응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이런 게 정치적 문제다. 바로 이런 문제를 푸는 게 정치다. 근데 정치판은 어떤가? 온통 새 정부의 인선에 관한 얘기뿐이다. 이 얄팍한 쇼를 구경하며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왜곡된다. 언론개혁을 한다는 네티즌들은 KBS 사장에 누구를 앉힐까를 논한다. 인터넷 혁명의 주역이라는 네티즌들은 ‘인터넷 살생부’나 만들고 있다. 정말 자기 삶과 직결된 문제가 뭘까? 새 정부의 인선? 민주당 내의 권력 다툼?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사회에서 자유롭게 해고될 가능성?

해고의 자유는 영남의 노동자만이 아니다. 호남의 노동자들도 그 자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설마 노당선자가 지역을 차별하겠는가? 나는 그의 원칙과 소신을 믿기에, 그가 노동자를 자유로이 해고할 때도 영·호남 차별 없이 공정하게 하리라 믿는다. 그럼 이에 맞서 우리 삶의 질을 대변하는 것은 누가 해야 할까? 물론 진보정당의 몫이나,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진보는 그야말로 정치적 학살의 대상이었다.

토벌은 끝났는가? 아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정신 나간 일부 지식인들이 진보정당 후보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노란 슈퍼맨을 따르는 네티즌들은 진보정당의 홈페이지에 몰려와 갖은 행패를 부렸다. 이들이 추앙하는 한 지식인은 어느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를 하던 중 진보정당을 향해 강한 악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 적대감,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게 민주주의인가?

노 당선자를 위해 지지선언을 조직한 노동계 인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 노란 슈퍼맨 덕분에 앞으로 ‘더 자유롭게’ 해고될 노동 형제들에게 뭐라고 얘기할 것인가?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는 존 레넌의 꿈이 정말로 실현됐다고 할 것인가? 한 노동자의 급료를 가압류하고, 그의 집마저 가압류함으로써 그를 정말로 소유가 없는 유토피아에 살게 해주지 않았냐고 강변할 것인가?

존 레넌의 ‘이매진’이 민주당 후보의 홍보에 무리 없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 보수당 후보가 진보적이라고 믿는 착시를 일으켜, 그에게서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아, 수구세력에 비하면 진보적이라고? 그럼 ‘수구’를 이제 사과를 배로 둔갑시키는 마법사의 묘약이라 부르자.

지난 5년과 똑같은 목표(정권 재창출), 똑같은 수사학(수구세력 저지), 똑같은 행태(표 몰아주기)가 다가오는 5년에도 지루하게 반복될 모양이다. 지겹지도 않은가? 이 사회에는 ‘진보’의 가치로 보수당에 대한 지지를 생산하는 거대한 기계가 있다. 그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른’ 욕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걸음을 멈춘 그곳에서 앞으로 나가는(進) 힘겨운 걸음(步)을 내디뎌야 한다.

〈진중권/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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