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수열사 미망인 “난 조선인···재판 열라”

2005.02.20 16:44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들어간 조선인은 3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5년 5월, 해방 불과 3개월 전에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 한성수 열사(1920~45). 일본군에서 탈출한 뒤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꽃다운 나이에 희생된 한열사의 숭고한 죽음 뒤엔 결혼 4년 만에 사랑하는 남편을 조국에 바친 정숙조 할머니(84)의 피맺힌 사연이 있다.

당시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죽음에 절규해야 했던 정할머니는 60년을 수절한 채 현재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보훈복지타운의 1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 모처럼의 남편 얘기에 목소리를 높이던 정할머니는 몇 장 남지 않은 남편 사진을 펼쳐 보이며 “이 양반이 이렇게 훤칠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정할머니는 20살에 결혼해 4년 만에 홀로 됐지만 한열사와 실제로 산 세월은 1년도 채 안된다고 했다. 그녀의 빛바랜 기억속에 있는 한열사는 평안북도 신의주 태생의 반골인사. 그는 일본 도쿄전수대학 유학시절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읽다 발각돼 정학을 맞았다. 공부나 하고 있는 것은 사치라고 판단한 그는 결국 제발로 학교를 걸어 나왔다. 44년 신혼의 단꿈이 무르익을 무렵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그는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학도병으로 끌려간다.

“그 양반이 끌려가면서 가족들에게 반드시 탈출해서 광복군에 찾아갈 것이라는 말을 남겼어요. 그해 겨울 그 추위가 잊혀지지 않는 어느날 일본 헌병들이 시댁에 들이닥쳤지요. 그때 ‘아, 남편이 탈출에 성공했구나’ 직감했지요.” 정할머니는 그로부터 며칠 뒤 매일신문사 기자로 있던 오빠로부터 남편의 광복군 입대 소식을 들었다.

광복군 대원이 된 한성수는 이상일이라는 가명으로 독립운동의 생명줄인 군자금 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던 중 45월 3월13일 부호 친일파의 밀고로 탈출한 학도병을 잡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던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는다. “이런, 실패다. 어서 뛰어.” 동료와 함께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던 한성수는 결국 헌병들에게 둘러싸여 철창신세를 진다. 한성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고문을 당해 엎힌 채로 일제 군법 재판장에 끌려 나온다.

정할머니는 당시 함께 감옥에 있던 동료 김영진으로부터 들은 사형 직전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자신이 직접 본 것마냥 생생하게 풀어 나갔다. “그이가 그랬답니다. ‘나는 조선인이기 때문에 조선말만 한다.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통역을 세우라’고 말예요. 결국 통역을 데리고 와서야 재판이 다시 열렸다고 하더군요.” 사형판결. 광복을 3개월 앞둔 5월13일 이역만리에서 한성수는 참수당했다.

같은 날 신의주. 정할머니는 설거지를 하던 도중 접시를 산산조각냈다. 불길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며칠 앞두고서야 동료 대원 김영진으로부터 남편의 사형소식을 들었다.

47년 김일성 군대가 평안도를 점령하자 정할머니는 2살배기 아들, 시부모, 시동생을 이끌고 남하, 서울 이태원에 둥지를 틀었다. 여름엔 바느질, 겨울엔 뜨개질로 입에 풀칠을 했다. 한성수가 남긴 유일한 분신인 아들을 보며 아픔을 잊고 살던 그는 85년 지친 서울생활을 접고 아들 내외와 함께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그러나 할머니의 삶에 드리운 비운은 남편을 앞세운 것에 그치지 않았다. 90년 하늘은 신장암이라는 이유를 대며 이번엔 아들을 데리고 갔다. 할머니는 5년전에야 다시 한국을 찾았다. 조국에서 마지막 생을 마무리하고 싶어서다. “20대에 과부가 됐다고 남편 복이 없단 말인가요. 남편 덕에 이만큼 따뜻하게 살고 있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는 5월 올해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한성수 열사(77년 독립장)의 추모식이 국립묘지에서 열린다.

〈수원|심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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