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온 생애에 걸쳐 ‘민족의 혼’을 노래…예술로 보여준 ‘최고의 정치’

2020.01.15 06:00
김언호

민족이 낳은 음악가 윤이상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왼쪽)과 함께한 윤이상.  김언호 제공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왼쪽)과 함께한 윤이상. 김언호 제공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2)온 생애에 걸쳐 ‘민족의 혼’을 노래…예술로 보여준 ‘최고의 정치’

1988년 10월6일 독일 베를린 자택을 방문한 나에게 우리 민족이 낳은 큰 음악가 윤이상(尹伊桑·1917~1995) 선생은 말했다.

“정치 이데올로기란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되어 지는 것이지만 민족문화란 저 창공처럼 푸르고 엄숙하고 영원합니다. 나는 하루 한 시간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지 못합니다. 내 민족 성원들 속에 나는 서 있습니다.”

세계가 평가하고 연주하고 연구하는 윤이상의 음악은 자기 조국에선 제대로 연주되지도, 연구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우리 출판사라도 나서서 선생의 예술적 성과를 제대로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0월6일부터 11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면서, 나는 윤이상 음반 제작을 의논했다.

윤이상 선생은 한 해 전인 1987년 9월26일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비무장지대(DMZ)에서 남북 음악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민족음악축전’을 제안했다. 남과 북 음악가들이 손을 맞잡고,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바로 그 전쟁터에서, 음악으로 평화와 통일을 노래하자는 경이로운 아이디어였다.

1988년, 음반 제작 의논차 방문…
경상도 악센트 느껴지는 한국 할아버지의 환대

윤이상 선생을 만나는 그날 다소 긴장했다. 1956년 유럽으로 건너간 지 30년 이상 세월이 흐른 지금 작곡가 윤이상은 어떤 모습일까. 세계에 우뚝 서는 음악가 윤이상은 그러나 한국의 편안한 할아버지였다. 베를린의 반세 호숫가 자택 문 앞에서 선생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하는 선생의 어투에는 약간의 경상도 악센트가 있었다. 선생 자택은 독일 정부가 예술가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10월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다. 베를린이 ‘유럽의 문화도시’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는 음악회였다. 나는 선생의 초대로 음악회에 참석했다. 10일에는 하루 종일 선생과 인터뷰했다. 선생은 가슴에 묻어둔 생각을 털어놓았다.

■ 내 삶에 결정적 계기 된 ‘동베를린 사건’

“동베를린 사건으로 또 하나의 세계 발견…
민족·분단 문제를 보다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계기 돼”

- 선생님 음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것인가요?

“동베를린 사건은 나의 삶과 예술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합니다. 동베를린 사건 이전에 나는 동양의 음악가로 동양적 인간, 동양적 정신에 내재하는 심미적인 작품을 쓴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인적인 예술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개인적·집단적 체험은 민족 문제·분단 문제를 보다 구조적이고 온몸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분단으로 억압받는 민족과 민중, 통일의 문제, 폭력으로 고통받는 인류, 세계 평화의 문제가 나의 삶, 나의 예술과 결코 무관할 수 없습니다.”

- 선생님의 음악예술을 창출하는 힘이란 어떤 것일까요?

“내 음악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구성해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서양과 달리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개별 인간의 소유가 아닙니다. 예술이란 이 우주의 흐름이지요. 나는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예술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음악은 이 전통을 그대로 갖고 있지요.”

윤이상 선생은 1967년 6월 베를린에서 부인 이수자 여사와 함께 서울로 납치된다.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다. 제1심에서 종신형, 제2심에서 15년형, 제3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부인은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203명이나 되는 유학생·예술가들이 수사받았지만 간첩죄로 인정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조사위원회는 조사 과정에서 불법연행과 가혹행위를 한 사실을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동베를린 사건은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통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67년 감옥에서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꿈’ 악보.

1967년 감옥에서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꿈’ 악보.

윤이상 선생은 감옥에서 장자의 꿈을 소재로 한 오페라 <나비의 꿈>과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 강서고분의 사신도에서 영감을 얻은 ‘영상’(이마주)을 작곡했다.

“물사발이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손을 불어가면서 음보를 적어나갔지요.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정신적 위안은 오직 음악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로부터 해방되고 꿈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를 찾고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인간정신의 숭고함과 절대적 순수를 찾아나섰습니다.”

동베를린 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독일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했고, 지식인·예술가들이 “윤이상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꿈>이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빈에서는 연주회가 끝나고 연주자들과 관객들이 ‘윤이상 석방’하라면서 횃불행진까지 했다.

■ 정치가는 음악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할 수 있다

- 남북 음악가들이 DMZ에서 음악제를 하자는 제안은 놀랍습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혼과 양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중을 깨어 일어서게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시벨리우스는 ‘핀란디아’로 핀란드 국민에게 민족독립운동의 혼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체코의 스메타나는 ‘나의 조국’을 통해 체코 민중들을 순결한 애국심으로 불타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휴전선에서 민족음악을 울려 민족화해의 광장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문화를 옹호하는 나에겐 남도 북도 나의 조국입니다.”

- 어떤 음악이 연주되어야 할까요?

“베토벤 같은 서양음악이 아니라 우리 음악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하고, 부르고,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남한 작곡가의 작품과 북한 작곡가의 작품, 우리 민요를 남북 음악가들이 함께 연주하고 노래합니다. 내 작품도 연주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이 음악제를 위해 1987년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이미 만들었습니다. 45분 정도 되는 이 곡은 남한의 민족시인들 가사로 합창합니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가 없습니다. 정치적 발언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남북 정부가 동의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4월이나 5월이 좋겠습니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새로운 창조의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선생의 70세 생일 기념으로 출간된 <작곡가 윤이상>에서 루이제 린저가 썼다.

“남도 북도 나의 조국” DMZ 남북 음악축전 제안은 민족음악 울려
‘화해의 광장’ 만들려는 뜻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감옥 속에서 자유로우며, 죽음에 직면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쓰고, 불구덩이 속에서 노래한다는 것, 일견 모순되는 것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윤이상은 증명해준다. 예술이 높은 수준의 정치활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윤이상 선생의 DMZ 음악제 제안은 그러나 성사되지 못했다. 남북 문제는 그만큼 어렵다는 걸 실증하는 것이었다.

■ 음반 제작 좌절되고 <윤이상의 음악세계> 출간

1989년 2월 귀국길, 공항서 선생의 CD·사진 압수당해
돌려보낸 뒤 레코드는 결국 한 권의 책으로

나는 일단 귀국했다가 1989년 2월 구정을 할애해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윤이상 선생의 작품과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독일에 유학 중인 한정숙(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성만(현 이화여대 독문학과 교수), 홍은미(음악학)씨가 윤이상 선생 댁으로 모였다. 1주일 동안 선생의 댁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윤이상 연구와 리뷰를 조사했다. 음반의 구성을 토론했다.

선생이 갖고 있는 사진들을 정리했다. 선생은 50장이 넘는 오래된 사진들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 나는 선생의 안내로 선생이 재직했던 베를린예술대학의 ‘윤이상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전임 연구자를 두어 선생의 음악에 관한 모든 연구와 자료를 집성시키는 연구소였다.

윤이상 아카이브에서 확보해준 오리지널 CD와 사진 자료들을 갖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윤이상 선생의 CD와 사진 등 자료를 김포공항에서 압수당했다. ‘윤이상 음악’은 김포공항에 6개월 동안 유치되는 것이었다. 최성만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편에 그 자료를 선생에게 되돌려보내야 했다. LP 열다섯 장 정도 될 것으로 예측하고 표지화를 이철수 화백의 목판화로 해보는 계획도 세웠지만 음반 제작은 무산되었다. 그땐 문화공보부의 허가 없이는 음반을 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1년6개월 동안 출국금지를 당해야 했다.

우리는 결국 레코드 출간을 위해 준비한 원고들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1991년 2월 최성만·홍은미 편역의 <윤이상의 음악세계>가 그것이다. 634쪽이나 되는 책으로 윤이상의 음악세계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 유골로 귀향한 음악가 윤이상

나는 선생과 가끔 통화했다. 한국에서 나온 책을 보내드렸다. 그러나 선생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일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찾아뵙기도 했다. 선생은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 배를 타고 대마도까지 왔다. 일본의 한 방송국 취재진과 동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바다에서 멀리 고향 통영을 바라보았다.

베를린에서 뵈었을 때 선생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선생의 그 간절한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1995년 11월13일 타국 땅 베를린에서 서거했다.

다섯 개의 교향곡 등 수많은 문제작을 남긴 선생의 삶은 고단했다. 그러나 한 음악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생애였다. 독일 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비롯해 세계의 권위 있는 상들이 민족과 조국을 사랑한 그에게 수여되었다.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와 ‘화염 속의 천사’…
선생은 서거하는 날까지 조국을 노래했다

1980년대 초 나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은밀히 듣곤 했다. 선생은 1981년에 5·18 광주항쟁의 그 비극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어찌 이런 비극이 내 조국에서 일어나다니!”

그때 베를린에서 선생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열사들에게 바치는 음악을 만들겠다고 했다. 선생은 서거하는 그해 그 작업을 해냈다. ‘화염 속의 천사’가 그것이다.

1988년 10월 윤이상의 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김언호(위 사진의 오른쪽). 통영음악당 앞마당에 있는 윤이상의 묘(아래). 묘비명 ‘처염상정’(處染常淨)은 윤이상이 좋아하는 문구로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의미한다.  김언호 제공

1988년 10월 윤이상의 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김언호(위 사진의 오른쪽). 통영음악당 앞마당에 있는 윤이상의 묘(아래). 묘비명 ‘처염상정’(處染常淨)은 윤이상이 좋아하는 문구로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의미한다. 김언호 제공

2018년 3월30일, 윤이상 선생은 49년 만에 유골로 고향에 돌아와서, 그 고향 땅에 묻혔다. 고향의 드넓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통영음악당 앞마당이다. 그 음악당에서 연주되는 자신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윤이상은 이제 더 연주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정치적 그늘로부터 벗어나 그의 음악을 더 사랑할 것이다. 선생의 청정한 말씀이 나의 귓전에 쟁쟁하다.

■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기도 하다. <책의 탄생> <책의 공화국에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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