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우린 왜 가해자 편에 기울었을까” 판사들의 반성

2020.04.29 06:00 입력 2020.04.29 07:00 수정

n번방 사건을 계기로 판사들이 말하는 ‘성폭력 범죄’ 사법시스템의 한계

[성범죄법 잔혹사]⑥“우린 왜 가해자 편에 기울었을까” 판사들의 반성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둘러싼 시민들의 분노가 법원으로 향하는 지금, 판사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릴 때부터 수재로 불리며 합격률 3%의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은 엘리트들이 집결한 법원. 그 법원이 지나치게 낮은 형량의 판결로 n번방 범죄자들을 키웠다는 비판을 판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들이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 낮은 형량을 선고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바깥에선 잘 알기 어려운 법원 내부의 사정이 궁금했다. 경향신문은 어렵게 현직 판사 4명을 각각 심층 인터뷰했다. 성폭력 범죄 재판을 담당해본 경험이 있는 판사들이다. 이들에게 n번방 사건과 성폭력 범죄를 대하는 사법 시스템에 관해 물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 판사들은 공통적으로 디지털 성범죄 재판의 법정이 가해자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했다. 재판에서 피해자 목소리는 배제돼 있다고 했다.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는 법은 법전엔 있지만 법정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법원은 무엇을 놓치고 있나
변화 논의는 이제 시작이다

한 판사는 n번방 사건을 보고 두 번 충격받았다고 했다. “판사들은 잔혹한 사건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n번방 사건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더 잔혹하고, 가담자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점에서 충격이었어요. 또 하나는 국가가 시민에게 한 최소한의 약속이 범죄 피해를 당하면 구제해주겠다, 범인을 잡아주고 처벌해주겠다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그동안 재판을 해왔는데 잘못된 지점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런 (n번방 같은) 현상 앞에서 그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2차 충격을 받았어요. 이제까지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다른 판사는 “법원에 어떤 비판을 하든 다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고 했다. “우리가 얼마나 법에 정해진 절차대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느냐에 관해 분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도 나왔다.

n번방 사건은 ‘과연 사회에서 법원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법원이 범죄의 처벌 수위를 어떻게 결정하는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가해자에게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사회에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고 또 다른 잠재적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재판에서 피해자 보호 절차를 보장했는지에 따라 피해자는 2차 피해를 입기도 하고, 반대로 피해가 회복되기도 한다.

인터뷰에 응한 판사 4명은 전국의 판사 3000여명 중 극히 일부지만 이들의 솔직한 이야기에서 법원의 현실과 일선 판사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많은’ 사건을 ‘빠르게’ 처리해야 유능한 판사로 여겨져온 분위기 속에서 법원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가. 법원이 달라지기 위한 논의는 이제 시작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관계자들이 지난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n번방 가담자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관계자들이 지난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n번방 가담자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디지털 성폭력에 관대한 처벌…피해 심각성 이해 못한 탓이 크다”

판사들은 왜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 낮은 형량을 매겨왔을까. 한 번 불법촬영물이 퍼지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디지털 성폭력 범죄 피해 심각성을 판사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꼽혔다.

■ 판사들은 왜? “몰라서”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빠르게 발전하는 범죄에
판사들이 무지했던 점 인정

ㄱ판사의 말이다. “판사에게 오는 사건들은 하나씩 분절돼서 오거든요. 저에게 오는 사건이 전체적 흐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사건 너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들이 있는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n번방과 비슷한 사건을 (재판을 통해) 봤을 수는 있지만 그 너머에 26만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성착취 구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제 앞에 온 이 사건이 그 일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빠르게 변하고 있는 법정 밖의 세상에 대해 판사들이 더 민감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ㄴ판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외부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범죄가 발전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다보니까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이해나 공감도가 낮았던 것 아닌가 싶어요. (…) 영상이 업로드돼서 계속 피해가 확대되는 것인지 아닌지, (n번방에는) 어떻게 들어가는 것이고 클라우드가 뭔지 전혀 모르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디지털 성폭력 범죄가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가 낮았던 것 같아요. 솔직히 너무 몰랐기 때문에, 무지했던 점도 (낮은 형량의) 한 원인인 것이죠.”

‘뉴스는 안 보고 사건 기록만 본다.’ 사회와 거리를 두는 게 법관사회에서는 미덕처럼 여겨져왔다.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법원 문화는 익명의 피해자들이 많은 디지털 성폭력 범죄와 같은 사안에서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기계적 균형은 때로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하는 부정의를 초래하기도 했다.

성폭력 범죄에 대한 안일한 인식도 여전하다. ㄴ판사는 이어 말했다. “지금은 버스에서 중·고등학생의 허벅지를 만지면 인생이 좌우될 정도의 중범죄이지만 예전에는 범죄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죠. 예전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로 지금은 (가해자의) 인생이 끝나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으냐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고, 그런 기류가 수사 단계와 법원의 양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판사도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이고, 판사의 판단에는 사회의 통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ㄷ판사는 사회에서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 관해 더 많은 논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어떤 행동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에 대한 규범적 사고가 영향을 미칩니다. 디지털 성폭력은 ‘야동’이 정상이라는 관념과 긴밀히 연결돼 있잖아요. ‘(불법촬영물이) 나쁘고 처벌해야 되지만 주변의 남자들도 다 봤겠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야?’라는 식의 사고들이 있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서 무엇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논의하고, 그런 부분을 판사들이 준거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재판과 판결에 대한 모니터링과 분석, 비판도 법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봤다.

■ 성폭력 재판 절차의 문제

피해자의 상황이 어떤지
법원이 들어볼 기회도 없이
재판이 끝나는 경우 많아

피해자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하는 수사·재판 과정은 낮은 형량의 또 다른 원인이다. 경찰 단계에서 영상 녹화로 피해자 진술 조사를 진행하면 검찰 단계에서는 주로 피고인만 조사한 뒤 재판으로 넘어간다. 피고인이 혐의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법정에 피해자는 부르지 않는다. 피고인 말만 듣다보니 피고인의 서사에 이입하게 된다. 이는 성폭력 범죄를 판사가 판단할 때나,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이 판단할 때나 마찬가지다. 재판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ㄹ판사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법원이 들어볼 기회가 없다”고 했다. “법원 입장에서는 직권으로 피해자를 (법정에) 불러볼 수도 있지만 피해자에게 더 괴로움을 주는 것 아닌가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어요. 피해자 변호사가 선임돼 있기는 하지만 재판에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공판 검사는 담당해야 할 사건 수가 너무 많다보니 유무죄 입증에 집중하지, 양형사유나 피해자에게는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재판부도, 피해자 변호사도, 검사도 신경을 못 쓰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재판이 종결되는 거죠.”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는 사건이 많은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는 형량에 피해의 심각성이 반영되기 더욱 어렵다. 수사·기소·재판까지 피해자의 말이 들어 있지 않은 사건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n번방 사건 같은 경우 (피해자의) 유인, 성착취, 성착취물 제작, 유포, 소지, 협박, 유포의 반복 등 피해자별로 수개 내지 수십개의 범죄행위가 저질러졌고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기소돼 법정에서 기록으로 보는 범죄행위는 그중 단편적이고 일부분인 경우가 많아요. 판사들은 디지털 성폭력 범죄가 어떻게 시작되고, 일단 시작된 이상 끊임없는 유포와 재생산이 가능한 상태가 되고, 이게 피해자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ㄹ판사의 말이다.

죄질이 심각하다고 느껴도
기존 추세서 크게 벗어나는
중형 선고하기는 주저돼

디지털 성폭력 범죄를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법원 내에선 ‘다른 범죄와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판사들이 있다. 음주운전의 처벌 수위가 지속적으로 높아져온 것에는 별다른 논란이 없었지만 유독 성폭력 범죄의 처벌 강화를 둘러싸고는 논란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지난달 진행한 판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 범죄의 기본 영역으로 징역 3년이 적절하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던 것도 법원 분위기를 보여준다.

판사들은 일반적인 가중요소를 감안하더라도 징역 5년이 적절하다고 했는데,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다는 법 규정에 비해 한참 낮은 형량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설문조사의 예시 형량이 너무 낮게 설정돼 있다는 지적이 판사들 사이에서 나오기도 했다.

ㄱ판사는 양형위가 제대로 된 디지털 성폭력 범죄 양형기준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법원의 통상적인 선고 형량을 벗어나 혼자만 중한 형량을 선고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도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영상 등의 유포 가능성 때문에 계속 고통을 받는다는 점이 과소평가돼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 담당하는 사건의 죄질이 심각하다고 느껴도 ‘이 사건이 옆 재판부에 배당됐다면 기존과 비슷한 형량이 선고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기존 추세에서 크게 벗어나는 형을 선고하기가 주저되기도 해요. 그래서 양형위에서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통일된 양형지침을 마련해주는 게 (형량을 높이는 데) 제일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ㄷ판사는 말했다. “판사들이 형량을 정할 때 무시 못하는 게 유사사례거든요. 유사사례를 찾고 그 스펙트럼을 봐요. 설사 내가 이 범죄가 나쁘다고 생각하더라도 종전에 전혀 없는 형량을 선고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걸 통해서 판사들 간의 통일성과 안정성이 생기는 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디지털 성폭력 범죄가 우리에게 새로이 온 거예요. 형법의 ‘성 풍속에 관한 범죄’ 안에 음란물 범죄가 나오는데 법조인들은 법을 배울 때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것은 안 배웠어요. 이것은 단순 음란물과 다르고, 디지털 환경에서는 피해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무한 반복되는 속성을 간과한 채로 음란물의 유사사례로 보는 거죠. 각계에서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하던 대로 했던 거예요. ‘왜 이렇게 낮냐?’라고 (바깥에선) 의아해할 수 있는데 법원은 ‘하던 대로 한 건데, 너희가 갑자기 왜 이래’라고 할 수도 있어요. 신종 범죄 대응을 (판사들이) 잘 못한 것이죠.”



[성범죄법 잔혹사]⑥“우린 왜 가해자 편에 기울었을까” 판사들의 반성


ㄱ판사

“제게 오는 사건이 전체적 흐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사건 너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흐름들이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n번방과 비슷한 사건을 봤을 수는 있지만 그 너머에 26만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성착취 구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제 앞에 온 이 사건이 그 일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빠르게 변하고 있는 법정 밖 세상에 대해 판사들이 더 민감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ㄴ판사

“우리가 그만큼 디지털 성범죄의 특징에 무지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지금은 버스에서 중·고등학생의 허벅지를 만지면 인생이 좌우될 정도의 중범죄이지만 예전에는 범죄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죠.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로 지금은 (가해자의) 인생이 끝나게 되는 건 너무하지 않으냐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고, 그런 기류가 수사 단계와 법원의 양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ㄷ판사

“형량을 정할 때 무시 못하는 게 유사사례거든요. 설사 내가 이 범죄가 나쁘다고 생각하더라도 종전에 전혀 없는 형량을 선고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 법조인들이 법을 배울 때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것은 안 배웠어요. 단순 음란물과 달리 디지털 환경에선 피해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무한 반복된다는 속성을 간과한 채 음란물의 유사사례로 보게 된 거죠. 각계에서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하던 대로 했던 거예요.”

ㄹ판사

“피해자가 피해 이후 도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법원이 들어볼 기회가 없는 거예요. 직권으로 피해자를 (법정에) 부를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 더 괴로움을 주는 것 아닌가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요. 피해자 변호사가 선임돼 있기는 하지만 재판에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공판검사는 담당 사건이 너무 많아 유무죄 입증에 집중하지, 양형사유나 피해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재판부도, 피해자 변호사도, 검사도 신경을 못 쓰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재판이 종결되는 거죠.”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을 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을 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사 판례 집착’ 낮은 형량으로…양형위가 새 기준 마련해야

다른 범죄와 비교해보더라도 디지털 성범죄가 유독 낮은 형량으로 처벌된 경향은 분명히 있다. ㄹ판사는 불법촬영과 타인 간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경우를 비교해 설명했다. “별다른 죄의식 없이 배우자나 연인이 타인과 대화하는 것을 몰래 녹음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 경우에는 징역 1년 이상에 처하도록 법정형이 올라갔고, 벌금형 선고가 불가능해요. 타인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거나 이를 유포하는 범죄가 이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고, 피해 확산의 측면에서는 훨씬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데도 지금까지 가벼운 범죄로 치부돼왔던 것 같아요.” 대화를 녹음하면 무조건 실형인데, 몰래 신체를 촬영하면 벌금형 선고가 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 피해자 외면하는 시스템

‘성적 자기결정권’ 해석 때
피해자 책임론 빠지기 쉬워
성범죄는 인격권 전반 침해

성폭력 피해 당사자이자 피해자들을 지원해온 활동가 ‘마녀’(활동명)가 피해자 64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배제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범죄 피해자가 피해의 심각성 등을 진술할 권리가 있다고 헌법과 형사소송법 등에 규정돼 있지만 수사·재판에선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권리가 보장되는 정도도 재판부마다 달랐다. 설문조사는 법원 내부통신망에도 게재됐다.

설문조사를 봤다는 ㄴ판사는 “시스템이라는 게 사회적 약자에게 힘이 돼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는 언어체계가 무너진다는 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호소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며 “‘재판장들이 피해자들에게 법정에서 제대로 증언하지 못한다고 윽박지르거나 왜 이해를 하지 못하냐고 뭐라고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지적도 뼈아픈 부분”이라고 했다. ㄹ판사는 “피해자 권리 보장은 헌법상 권리이지만 판사들은 아직 생각이 제각각”이라며 “피고인과 검사가 재판의 주인공이자 당사자이고 피해자는 우리가 허용해야만 나와서 정해준 방식대로 진술할 수 있는 주변인으로 생각하는 판사들이 많다”고 했다.

성폭력 범죄 재판에서 가해자 형량을 낮추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합의’다. 양형위의 성범죄 양형기준 중 감경요소로 들어 있는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이 합의로 간주된다. 합의는 실형과 집행유예를 가르기도 한다. 준강간의 양형기준이 징역 2년6월 이상인데 합의가 안되면 실형 징역 2년6월을 선고하고, 합의가 되면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식이다. 가해자에게 실형과 집행유예는 천국과 지옥 차이다. 피해자가 신속하게 금전적 보상을 받으면 피해 회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ㄷ판사는 말했다. “피해자한테 ‘네가 거래 잘해서 챙길 건 챙겨라’라고 하는 거죠. 국가가 범죄 피해자를 구조하지 않고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고인이 재판을 받는 기회에 잘 편승해서, 상황을 잘 이용해서 피해를 변제받으라는 구조 같아요. 죄는 죄대로 받고 피해는 국가가 보상해줬으면 좋겠어요. 구상은 범죄자에게 하면 되니까요. 그게 국가의 의무가 아닌가 싶은데 마치 거래처럼 (합의가) 이뤄지고 있고, (형량에) 반영이 되더라도 지금은 너무 많이 반영되고 있어요.”

ㄹ판사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경제적 법익 침해와 달리 성폭력 범죄는 피해 전 단계로 상태를 완전히 되돌릴 수가 없잖아요. (…) 피해자와의 합의를 유리한 양형사유로 보더라도 미합의 시 실형받을 만한 사안을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것이 맞는지는 여전히 고민이 되는 부분입니다. 특히 미성년자에 대한 범죄나 수많은 피해자가 있는 범죄에서 보호자와의 합의나 일부 피해자와의 합의를 일률적으로 집행유예 사유로 보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정보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ㄱ판사는 “단순히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며 더 이상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전형적인 문구를 담은 합의서만 제출되는 경우 법원으로서는 그 너머의 사정을 알기가 어렵다”며 “피해자 변호사가 의견서로 합의가 진행된 경위, 합의금 액수와 지급 완료 여부, 피해자의 현재 상태 등을 재판부에 알려주면 적절한 양형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용어
피해자 일방적 공감하라는
의미로 오해한 적도 있어

최근엔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을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보는 데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보호법익이란 범죄로 인해 훼손되는 가치를 말한다. 보호법익이 침해됐다고 인정돼야 범죄가 성립한다는 점에서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을 무엇으로 볼지는 가해자 처벌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ㄱ판사는 이 같은 비판에 공감한다고 했다. 살인죄와 폭행죄의 보호법익은 생명이나 신체 그 자체이지, ‘생명·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라고 하지 않는다.

ㄱ판사는 “인격 살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범죄에서의 보호법익도 단순히 어떠한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고 봐야 하고, 성범죄는 그러한 인격에 대한 침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성범죄에서 보호법익을 자기결정권으로 보게 되면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식하거나 행사하기 어려운 아동이나 지적장애인 등에 대한 성범죄의 경우 보호법익의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

ㄷ판사는 최소한 아동·청소년의 경우에는 보호법익을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보는 게 부적절하다고 했다. ㄷ판사는 “아동·청소년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성에 대한 보호를 충분히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말 그대로 ‘결정권’이기 때문에 너무 협소하게 해석하면 피해자 책임론에 빠지기 쉽다는 지적도 했다. 타인에 대한 권력적 지배와 폭력을 기반으로 인격권 전반에 대한 침해가 일어나는 성범죄의 특성을 등한시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법원은 달라질 수 있을까

재판 때 이야기 잘 들어주고
절차적 권리 보장되도록
법원 시스템·인식 개선돼야

법원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자는 게 무죄추정의 원칙을 어긴다거나, 가해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재판을 하자는 취지는 아니다. 피해자 의견을 판사가 듣는다고 피고인의 방어권 침해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ㄹ판사는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부끄럽지만 대법원 판결에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라서 찾아봤어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서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공감하라는 의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도 그중의 하나였던 거예요. 여전히 판사들은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 당사자, 특히 피해자와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어느 한쪽 당사자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이입하거나 편파적인 감정을 가지면 안되지만 형사재판의 특성상 피고인을 더 자주 만나고, 피고인이 처한 상황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사실이고요. 그런데 마녀의 설문조사를 통해 피해자들이 하고 싶은 말, 피해자가 처한 상황, 성폭력 사건을 겪으면서 변하는 신체적, 정신적 특성 등에 대해 알게 됐어요.”

무엇이 바뀌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ㄴ판사는 “피해자가 2차 피해 때문에 법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했다. “피해자가 신고했더니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절차적으로 권리 보장이 되더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으로 개선돼야 할 것 같아요. 양형조사를 통해서 피해자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가해자의 사죄가 진정성 있게 이뤄졌는지, 합의가 실제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 합의대로 이행이 됐는지 등을 알아봐야 하고요. 피해자가 증언할 때도 부적절한 질문에 항의하거나 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인지원관을 통해 잘 알려주도록 좀 더 체계화해야 할 것 같아요.”

ㄷ판사는 ‘법대로’를 말했다. 법에 정해진 대로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범죄가 입증되면 책임도 지우면서, 동시에 법에 정해진 대로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뜻에서다.

“그동안에는 법원이 법대로가 아니라 빨리 재판을 하려고 했어요. 결론을 내는 게 중요하지 (절차적인 것들은) 번잡스럽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법관의 상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절차를 잘 지키는 게 훌륭한 판사라고요. 법대로만 하면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요?” 공정한 재판, 공평한 재판을 하자는 이야기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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