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 시대 오나

무너진 미 일극체제… 허 찌른 ‘차르’ 푸틴

2014.03.19 21:59 입력 2014.03.19 23:22 수정
구정은 기자

(1) 냉전 논리의 부활

1989년 이래로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 시절의 경쟁관계에서 벗어나 ‘전략적 파트너’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최근 몇 년 새, 특히 2012년 5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2기 체제가 출범한 뒤 갈등이 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동서갈등은 지나간 과거로 여겨졌다. 그 기본 전제는 더 이상 누구도 미국에 대적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대테러전과 경제위기를 지나며 정치·경제적으로 미국 일극체제는 붕괴했다. 러시아를 제어할 힘이 서방에는 없다는 것을 푸틴은 간파했다. 러시아가 옛 땅을 다시 합쳐 국경선을 바꾸기로 한 것은 옛 소련이 무너진 뒤 처음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19일 모스크바에서 2012년 5월 대통령 당선 당시 공약 이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각료들과의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모스크바 | 이타르타스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19일 모스크바에서 2012년 5월 대통령 당선 당시 공약 이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각료들과의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모스크바 | 이타르타스연합뉴스

▲ 다시 동서갈등 재연 우려… 러 제어할 힘 서방엔 없어
카자흐스탄·아르메니아 등 푸틴의 거침없는 행보 긴장
미국 네오콘들 신냉전 거론… 오바마의 ‘유약한 외교’ 공격

■ 허를 찌른 푸틴, ‘차르의 재림’

푸틴은 18일 크렘린에서 크림반도 합병을 선언했다. 그의 크렘린 연설에 따르면 “길고 긴 항해 끝에 크림은 모항(母港)으로 돌아왔다”. 크림반도 주민투표 하루 만에 푸틴은 의회·내각 통보 절차를 거쳐 크림 대표들과 합병조약을 맺었다. 모든 과정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19일에는 헌법재판소가 푸틴 대통령이 서명한 합병조약을 만장일치로 통과 시켰다.

푸틴은 의회 연설 뒤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예정에 없이’ 등장해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는 더 이상 구석에 몰려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000년 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가 러시아의 첫 국왕이 된 것을 거론하기도 했다. 가디언 등 서방 언론들은 일제히 ‘차르의 재림’이라고 보도했다.

정치분석가 드미트리 바비치는 러시아투데이 인터뷰에서 “서방의 제재는 타깃을 잘못 잡았다”고 단언했다. 일례로 제재 리스트에 올라간 옐레나 미줄리나 의원은 반동성애법을 주도한 사람이지, 우크라이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바비치는 유럽이 보류한 비자면제 협상에 대해서도 “2003년 푸틴이 제의한 이래로 유럽은 이미 10년간 미뤄왔다”고 비꼬았다.

[신냉전 시대 오나]무너진 미 일극체제… 허 찌른 ‘차르’ 푸틴

■ 무기력한 서방, 진영논리의 부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의 대응은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팃포탯(tit-for-tat) 전략이었다. 푸틴이 대화를 할 듯하면 대화를 제의하고, 푸틴이 강수를 두면 제재를 결정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러시아 전문가 토비 가티는 뉴욕타임스에 “이번 일은 지진이며, 그것도 규모 4 정도의 지진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푸틴이 생각하는 서방과의 경계선 안에는 이제 크림반도가 들어가게 됐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고도의 줄타기를 해야 하며, 서방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확대를 어디까지 밀어붙일지 결정해야 하는 고민을 떠안았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의회는 지난 6일 ‘나토 가입을 목표로 한다’는 법안을 내놨다. 하지만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일 경우 유럽 복판에서 완충지대 없이 러시아와 맞서야 한다. 이는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 엄청난 부담이다.

이번 일로 대립의 골이 깊어지고, 진영논리가 팽배해졌으며, 그것이 여러 국제현안 논의에 장애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 네오콘들은 신냉전을 거론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유약한 외교’를 공격하고 있다. 푸틴은 18일 중국과 인도 정상들에게 전화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대립선을 사이에 두고 편가르기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등은 러시아의 거침없는 행보에 불안해하고 있다.

[신냉전 시대 오나]무너진 미 일극체제… 허 찌른 ‘차르’ 푸틴

■ 러시아의 다음 수순은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냉전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냉전이 다시 올지는 푸틴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신냉전’으로 보는 데에는 반론도 많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은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아니다. 소비에트의 80년 체제를 거친 탓에 러시아와 주변 지역에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은 희미하거나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크림반도의 러시아계는 러시아 귀속이 1990년의 잘못된 분리를 바로잡는 과정이라 말한다.또 지금의 갈등이 냉전처럼 수십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BBC방송의 외교전문기자 조너선 마커스는 “러시아는 옛 소련이 아니며, 글로벌 경제는 (냉전과는) 다른 맥락에서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수시로 중국 위협론을 들먹였지만 미·중관계는 신냉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서방의 ‘푸틴 위협론’에도 정치선동의 측면이 적지 않다.

반면 푸틴이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푸틴은 18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계 동부 지역과는 선을 그었다. 하지만 BBC는 “2008년 조지아에서 분리시킨 지역들은 푸틴 테이블의 전채였으며, 크림반도도 메인코스는 아니다. 메인은 우크라이나 자체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쨌든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서방에 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