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려고 만든 제도 아니다'...미, 필리버스터 개정 목소리

2021.03.25 19:18 입력 2021.03.25 21:48 수정

투표권 확대법, 노조 강화법, 3조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법, 차별금지법, 그리고 총기규제법.

모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핵심 아젠다이지만, 필리버스터의 벽에 줄줄이 가로막힌 법안들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50대 50으로 의석을 양분한 상원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캐스팅보트를 쥐고있다 해도, 공화당이 필리버스터를 행사하면 어느 것 하나 통과시킬 수 없는 게 미국 정치의 현실이다. 필리버스터를 무력화 하려면 60표가 필요한데, 공화당에서 10명 이상의 이탈표를 이끌어 낼 확률은 0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 단체들이 벌인 필리버스터 폐지 청원운동.

미국의 진보 단체들이 벌인 필리버스터 폐지 청원운동.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도 필리버스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민주당이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애틀랜타와 콜로라도 총격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공화당이 총기규제법의 통과까지 막으려 할 경우 더이상 필리버스터를 남용할 수 없도록 제도 자체를 손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최근 악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을 만든 제헌의회에서 지금같은 필리버스터는 논의된 적도 없다”며 “남북전쟁 이전 노예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규정을 악용해 필리버스터를 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주로 민권법 제정을 막는데 활용해 왔다”며 제도의 정당성 자체를 문제 삼았다. 이어 “민주주의 의사결정 원칙은 다수결이지 필리버스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지아주 첫 흑인 상원의원인 라파엘 워녹도 투표권 확대법 통과를 주장하며 “의회 내 소수당을 보호하기 위한 필리버스터가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을 침해하는데 쓰이고 있다니 모순적”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필리버스터가 지금처럼 정국을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은 1975년부터다. 이전까지는 투표 참석 의원의 3분의 2(전원 참석시 67석) 동의를 확보하면 필리버스터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전체 의원 5분의 3(60석) 동의를 얻어야 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뉴욕타임스는 “1970년대까지는 3분의 2 이상이 찬성표를 던지지 못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소수당이 직접 의회 단상에 올라 장시간 토론연설을 해야 했다”며 “하지만 규정이 바뀐 후부터는 다수당으로 책임이 쏠리게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현재의 필리버스터 규정 하에서 공화당은 굳이 단상에 올라 장시간 연설을 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공화당이 “60표를 모아오지 않으면 필리버스터를 행사하겠다”고 통보만 하면 민주당은 법안 상정 기회조차 포기해야 하는 구조다. 뉴욕타임스는 “토론과 설득으로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필리버스터가 오히려 의회 내 토론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과거 의회에서 밤샘 토론을 하며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는 모습.

과거 의회에서 밤샘 토론을 하며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는 모습.

핵심 법안들이 잇따라 저지되자, 의회주의를 강조하며 필리버스터 개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36년 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ABC방송 인터뷰에서 “필리버스터 폐지에는 여전히 반대하지만, 행사를 보다 어렵게 하는 쪽으로 개정하는 것은 지지한다”며 “(1973년에) 내가 처음 상원의원이 됐을 때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호한다. 그 때는 단상에 올라 계속 토론을 해야 했다“고 언급했다.

민주당과 진보진영은 상원 의석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이 필리버스터 제도를 손볼 수 있는 적기라고 보고 있다. 다이앤 파인스타인 민주당 상원의원 등 필리버스터 폐지에 반대했던 민주당 의원 중에도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다. 미 의회법을 전공한 서정건 경희대 정외과 교수는 “필리버스터를 무력화 하기 위해서는 60표가 필요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필리버스터 룰을 바꾸기 위해서는 51표만 있으면 된다”며 “관건은 민주당 상원의원 전체를 규합해 50표를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내 보수파인 조 맨친 상원의원과 키어스틴 시네마 상원의원이 필리버스터 제도 개혁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총기규제법에 반대하는 맨친 의원은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는데 동의하는 쪽으로) 내가 입장을 바꿀 가능성은 앞으로도 전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필리버스터를 개정할 경우 “핵겨울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 경고한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의원.  /로이터연합뉴스

필리버스터를 개정할 경우 “핵겨울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 경고한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의원. /로이터연합뉴스

공화당도 필리버스터를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최근 팟캐스트에 출연해 “민주당은 핵 전쟁 이후의 추운 겨울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공화당의 한 측근은 “매코널은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의회법에 규정돼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민주당과 맞설 것”이라고 악시오스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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