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평양’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친근하게 불리는 곳이…”

2018.04.27 15:58 입력 2018.04.27 16:13 수정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냉면’을 언급하면서 전국 곳곳 평양냉면 전문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트위터에서 ‘평양냉면’ 관련 트윗은 이날 낮 12시 기준 3만2000여건에 이르며 실시간 트렌드 1위를 기록했다. (▶기사보기 -김정은의 “멀리서 온 평양냉면”에…때 아닌 ‘평양냉면 문전성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후 서울 한 유명 냉면집 앞에 줄이 늘어서 있다. 연합뉴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후 서울 한 유명 냉면집 앞에 줄이 늘어서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는 회담 장소인 평화의집 곳곳을 미술품으로 꾸몄는데, 평화·화해를 기원하고, 회담 성공을 바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기사보기-“아름다운 금강산처럼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 왔으면…”) 이날 ‘평양냉면 열풍’을 보면서 떠오른 작품이 있다. 김기라의 2013년 작 ‘북쪽으로 보내는 서한들_수취인 불명_황해’(이하 수취인불명,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이다. ‘이념의 무게’ 영상 설치 연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백령도에서 촬영했다. 연평도, 대청도, 소청도, 우도와 함께 서해 5도의 하나인 백령도는 남북한 분단과 대치 상황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곳이다. 북한은 2010년 연평도에 포격을 해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김기라는 이곳에서 이념과 통일에 관한 영상을 만들었다. 김기라는 ‘수취인불명’의 편지를 쓴 뒤 유리병에 넣어 바다로 띄어보낸다. 이름 모를 북측 친구가 받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27일 강원 춘천시내 유명 평양냉면 식당에서 시민들이 냉면으로 점심을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강원 춘천시내 유명 평양냉면 식당에서 시민들이 냉면으로 점심을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

편지는 평양냉면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남한에서 ‘평양’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친근하게 불리는 곳이 또 어디 있겠냐는 생각이 들 때면, 혼자 웃기도 합니다. ‘‘평양’을 큰 소리로 외치건,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적은 깃발이 펄럭이건 누구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김기라는 평양냉면과 북쪽으로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남북 관계가 무엇인지, 통일 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작가는 그 시작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영상 중 편지 나레이션 전문이다.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작가제공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작가제공

“평양냉면 하면 떠오르는 냉면을 먹다가 당신 생각이 나, 편지를 적습니다. 아 참, 식사는 하셨습니까? 요즘처럼 날씨가 후덥지근해 지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냉면이 생각납니다. 누구는 더운 몸을 파고드는 얼얼함이 냉면의 매력이라고 하던데, 나는 톡톡한 메밀 면에 담백한 국물 맛을 좋아해 평양냉면을 으뜸으로 꼽는답니다.

평양냉면, 이름만 되뇌어도 입안에 침이 또 고이는군요. 당신은 어떤 냉면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네요.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김기라는 백령도 앞 바다에 이름 모를 북한 친구에게 쓴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보냈다. 작가제공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김기라는 백령도 앞 바다에 이름 모를 북한 친구에게 쓴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보냈다. 작가제공

나는 냉면집의 풍경도 참 흥미롭습니다. 남한에서 ‘평양’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친근하게 불리는 곳이 또 어디 있겠냐는 생각이 들 때면, 혼자 웃기도 합니다. ‘평양’을 큰 소리로 외치건,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적은 깃발이 펄럭이건 누구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똑 같은 상황이 시내 한복판 광장이나 군중이 모인 집회 현장에서 펼쳐졌다면 아주 예민해졌을 일인데 말이죠.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작가제공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작가제공

냉면이 중국에서 유래한 찬 국수든, 우리네 전통음식이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지금은 어엿한 우리 음식인데. 소박한 이 음식을 조선의 순조 임금이 야식으로 드셨고, 고종 황제도 덕수궁에서 겨울 야참으로 냉면을 즐기셨다더라고요. 냉면 한 그릇이 왕부터 평민까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북쪽부터 남쪽까지 두루 섭렵한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음식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닐까요? 맛에 대한 공감은 같은 기억의 공유니까요. 이건 우리가 한 핏줄이고, 한국말을 사용한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라고 생각해요.

밥 한끼 먹는데 무슨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무게가 있겠어요? 이 순간 나에게 신념이 있다면, 다시 못 올 오늘의 이 한끼를 ‘맛있게’ 먹어야겠다는 의지가 있을 뿐이죠. 그게 평양냉면이든 개성만두든, 벽제갈비든 섬진강 재첩국이든 상관없다구요. 잘 지내세요. 끼니 거르지 말고요.

2013년 7월 당신의 친구 김기라”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김기라는 백령도 앞 바다에 이름 모를 북한 친구에게 쓴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보냈다. 작가제공

김기라 ‘수취인 불명’ 중 . 김기라는 백령도 앞 바다에 이름 모를 북한 친구에게 쓴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보냈다. 작가제공

김기라는 ‘작품노트’에서 이렇게 썼다.

“갈등, 분노, 대립, 충돌로 달아오른 대한민국은 감정적으로 ‘덥다’. 미디어를 통해 혹은 피부로 직접 만나는 정치,자본, 종교, 역사, 남북, 노사, 지역 간의 갈등에다 개인 간의 싸움까지 그칠 줄 모른다. 내가 말하는 ‘이념’은 좌우 색깔론을 넘어, 이같은 갈등 유발요인 모두가 공동을 위한 이념들이다. 이념의 무게에 짓눌린 세상, 그래서 나는 슬프다.…제주, 평택, 광화문, 백령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나는 공동선을 위한 이념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벼이 할 수 있을 방도를 찾고 있다. 이념의 무게로 타들어 가듯 더웠던 어느 날,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수취인불명’의 편지를 쓰게된 이유다. 물론 주제가 힘들고 무겁다. 그러나 난 이 작업에 앞어 문화와 역사 삶을 공유하는 지금 여기 지역성을 넘어 개인의 삶과 한끼의 식사에 내 마음을 담았다. 더울때 먹는 음식, 또 문화와 역사 민족을 공유할 수 있는 음식을 통해 나와 혹은 그 작업을 바라보는 이의 시간대가 공통의 언어 공통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지금 여기 우리에게 직면한 상황의 인식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바라보길 원하고 있다.”

‘수취인 불명-황해’는 2013년 백령도 피난 벙커, 독일 NRW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시립미술관), 스페인문화원 등지에서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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