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원자폭탄을 경험한 일본 만화가의 ‘그날’에 대한 증언과 유언

2014.01.03 19:27 입력 2014.01.03 22:20 수정

▲ 나의 유서 맨발의 겐…나카자와 케이지 지음·김송이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32쪽 | 1만2000원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날’의 일들을, 이제는 그림이 아니라 입으로 증언하고 싶다.”

그날은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우라늄 235형 핵폭탄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 중심부에 떨어진 때이다. 핵폭탄이 정체를 드러낸 후 당시 히로시마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시체 태우는 연기와 시체에서 우글거리며 꿈틀대는 구더기 떼와 강을 따라 떠내려가는 시체들뿐이었다고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는 말한다.

[책과 삶]원자폭탄을 경험한 일본 만화가의 ‘그날’에 대한 증언과 유언

<나의 유서 맨발의 겐>은 나카자와의 자전적 만화 <맨발의 겐>이 왜 자신의 유서와도 같은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집필을 마친 후 2012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앞서 <맨발의 겐>은 일본에서 12년간 연재되며 10권짜리 단행본으로 묶여나왔고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서 번역 출간됐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진 뒤 이 세상의 지옥을 지켜본 소년 ‘겐’이 전쟁의 재앙을 헤치고 가난과 온갖 편견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나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만화가인 저자는 핵폭탄의 참혹상을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다. 아버지와 누나, 동생을 잃은 개인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노인부터 갓 태어난 아기까지 몇 십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어간 히로시마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히로시마는 무지한 전쟁이 빚어낸 가장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었다”고 회고한다.

책에는 <맨발의 겐> 만화 장면이 일부 소개돼 있다. 그림이지만 끔찍하고 징그러워 불편한 장면이 많다. 일본이 원폭 피해국이지만 <맨발의 겐>이 일본에서 환영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원폭을 팔아 돈벌이 한다’ ‘집안의 수치를 잘도 쓴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동료 만화가들조차 그를 ‘사악한 만화가’라고 불렀다. ‘아이들 정서교육에 좋지 않다’며 압력을 넣는 부모도 있었다. 연재를 꺼리는 분위기 탓에 만화잡지를 옮겨가며 휴재와 재연재를 반복하며 완결하느라 12년이 걸렸다.

그는 “여섯 살 난 내 망막에 새겨진 원폭의 진상을 <맨발의 겐>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그려내려고 마음먹었지만 참혹함을 최대한 약하게 나타내야 했다”고 고백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이 일본 타지역에서 전염병 환자로 취급되며 결혼은 물론 교육과 취업에서도 얼마나 온갖 편견과 차별을 받았는지도 숨기지 않았다.

나카자와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천황에 대한 비판을 만화에 담았고 천황이 히로시마를 격려 방문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어놨다. “천황 폐하가 히로시마에 오시니 전교생이 국기를 들고 환영하러 간다는 거였죠. ‘천황 명령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그래서 핵폭격도 당하고, 아버지들도 죽어간 거잖아! 뭣 땜에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한테 깃발을 흔들어야 해?’ 싶어, 나는 다음날 빈손으로 등교했어요.” 또 “진주만 공격 때 쇼와 천황이 ‘그만둬’라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많은 사람들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장본인이 전후에도 천황 자리에 유유히 앉아 있는데, 그런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어요. 나는 지금도 천황제는 정말 무서운 제도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책을 덮고 나면 그의 유언과도 같은 한마디가 또렷이 들리는 듯하다. “인류에게 최고의 보물은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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